I후불제 인생I
인생은 게임에 비유하곤 한다. 규칙이 있고, 점수가 있으며, 성실하게 임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게임처럼. 노력은 경험치가 되고, 인내는 레벨을 올리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배운다. 포기하지 말 것, 남들보다 한 번 더 견딜 것, 결국 이기는 쪽은 끝까지 경쟁하고 버틴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인생이 조금 불공정해 보여도, 기본적인 보상 구조만큼은 공정할 거라고. 애쓴 만큼은 최소한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매번 게임판에 성실히 참여했다. 손해를 봐도 규칙을 지키려고 했고, 불리한 조건에서도 게임을 계속했다. 언젠가 점수판이 나를 알아볼 거라 믿으면서.
남들만큼은 했다. 그들보다 늦게 시작해도 더 오래 달렸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길 대신 돌아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는 잃은 것도 많았다. 여유, 웃음, 가끔은 자존심까지. 하지만 이건 아낌없는 투자라고 여겼다. 오늘의 적자는 내일의 흑자를 위한 과정이라 여겼다. 인생은 반드시 고난대비 삶의 균형을 맞출 것이라고 마음에 새겼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게임의 룰이 흔들렸다.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이 먼저 보상을 받고, 규칙을 어긴 사람이 더 빠르게 다음 판으로 넘어갔다. 심지어 심판은 그 순간만큼은 침묵했다. 항의할 수 있는 창구도, 재심을 요청할 버튼도 없었다. 점수판은 깜빡거렸고, 기준은 수시로 바뀌었다. 그제야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룰은 기대만큼 공정하지 않았다.
위기는 조용히 찾아왔다.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던 날. 그날, 나는 처음으로 게임의 룰을 의심했다. 정말 이 판에 계속 남아 있어야만 할까. 아니면 애초부터 보상 따위는 기대하지 말았어야만 할까. 내 노력은 온통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어느 날,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한 노인의 손을 보았다. 그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곱게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누가 봐도 꽤 많은 시간을 일로 버티며 살아온 손이었다. 그분의 손에는 인생 트로피도 메달도 없었다. 겉모습은 패배자 같았지만, 그의 손에는 메달 대신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 손은 말이 없었지만 오래 버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가 노년에 서 있는 게임판이 화려하지 않다고, 게임판에서 실패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게임의 룰 속에서 모든 칩에 보상을 걸지는 않았다. 그 대신 나에게 걸기로 했다. 불공정한 게임의 룰에서, 그나마 삶을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였다. 결과를 조작할 수도 없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를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이기지 못해도 망가지지 않는 법. 보상받지 못해도 나를 버리지 않는 법. 그것은 내가 선택한 새로운 룰이었다. 이길 수는 없어도 무너지지 않을 수는 있다. 나는 그 방식으로 계속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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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개: 기안장_브런치 작가, 2025년 항공문학상 우수상, 2024년 원주신문 올해의 오피니언상, 밀리의서재 올해의 밀리로드 Top 50, 문장21 시부문 신인문학상, 문학광장 수필부문 신인작가상 수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