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는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갑자기 미국 교환학생 시리즈도 끝나지 않았는데 웬 독일 어학연수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쩌다 보니 미국 교환학생 시리즈가 길어지기도 했고, 현생이 바쁘다 보니 자연스레 독일에서의 소중한 한 달 기억이 휘발될 것 같았다. 물론 미국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다 보니 자연스레 한 달을 지내며 보낸 하루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 특히 유럽이라는 대륙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상상 속에서만 듣던 유럽을 몸소 체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대륙을 단순히 눈으로 보고 끝내기보단 한 달 동안 진득이 느끼며 살아본 경험은 참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여유롭고 느긋한 유럽에서, 독일에서 보냈던 여름.
2024년 8월 한국은 너무 더웠다고 하던데, 독일도 그러했지만 해질녘 즈음 나무 밑 그늘에서 더위를 잠시 피해 나부끼는 나뭇잎사귀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유럽이라는 것을, 독일에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여름은 그늘 속에 있어도 푹푹 찌기 마련이니까. 신기루가 만들어 낸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다. 어딜 가든 한국이라면 당연히 있는 에어컨도 독일에서는 못 보기도 해서 참 신선하기도 하고.
아침과 저녁은 한여름이라도 가을 날씨가 되어 춥지만, 독일에서는 그 특유의 "Frische Luft(신선한 공기)"를 위해 항상 창문을 열어둔다. "Machen Sie bitte das Fenster auf?(창문 좀 열어줄래?)" 창문 쪽에 있던 나에게 교수님이 맨날 말씀하셨던 말이다. 추위를 많이 타던 내가 창문을 닫아두었는데, 항상 누가 창문을 닫았는지 궁금해하시다가도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며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셨다. 전형적인 독일인의 모습이라는데, 실제로 다들 환기에 상당한 집착(?)을 하는 듯하다. 환기가 좋기는 한데, 얼어 죽을 듯이 추워도 창문을 여는 것이 독일인의 습성이라나.
그나저나 갑자기 왜 독일에? 한 달을? 어학연수로?
혼자 떠나는 건 처음인데, 그게 독일이라니.
문장 그대로다. 나는 작년 로스쿨을 준비했었고, 7월경 LEET가 끝나고 9월 흔히 POST-LEET라고 불리는 자소서 및 면접 준비 전, 그럴듯하면서도 한국을 떠나 쉴 핑계가 필요했다. 나 자신에게도, 훗날 자기소개서에도 합리화할 수 있는 장기 도피가 필요했다. 사실은 한 달간 유럽 여행을 다녀올까 싶었지만, 시간이 맞는 친구들이 없었다. 결국 가장 최적의 방안은 한 달간 독일에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것. 독일어 전공자로서 독일을 다녀오지 못했다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고, 어딜 가든 발목을 잡았다. 과 동기들과 얘기하다가도 독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들은 아 베를린 느낌이다~ 독일에서는 이런 거 팔았는데라고 했을 때, 공감하고 싶어도 공감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잠시나마 일본에 다녀와도 일본어가 늘은 게 느껴지는데, 독일에서 한 달이나 있다 보면 더욱이 그러하지 않을까?
그래서 LEET 공부를 하다가 집중이 되지 않을 때에는 DAAD 사이트에서 독일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학교 리스트를 찾아 헤맸고, 레벨 및 강의 유형이 매우 다양해 원하는 항목만 추리기까지 다소 걸렸다. 결국 추린 곳은 총 세 곳. B2-C1 수준의 수업을 제공하면서도, 수업료 및 기숙사비가 그다지 높지 않고, 주변 환경이 괜찮고(대학 도시이거나, 주변 치안이 괜찮거나, 물가가 나쁘지 않거나, 여행하기 좋거나, 치안이 좋다거나),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대학교를 고르는 것이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나머지 한 곳은 튀빙겐 대학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지어 DAAD에서는 몇 명의 학부생을 선발하여 무료로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걸 알았더라면 수료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나는 이미 학부 수업을 마친 후 수료를 해두었고, 졸업 신청을 안 했을 뿐 사실상 졸업생이나 다름이 없어 장학생으로 신청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나는 B2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서류 제출 및 독일에서의 장학금 수령 과정이 좀 번거로울 수는 있어도 무료로 수업과 기숙사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이를 놓쳐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에게는 한 달이라는 귀중한 시간이 있었고, 이는 취직을 하거나 로스쿨에 가게 된다면 다시는 오지 않을 황금 같은 자율 기간이었다. 무리가 되지 않는 한,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서 독일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삼성과 SK하이닉스 주식을 팔고, 인턴 생활을 하며 모아놓았던 돈으로 왕복 비행기 항공표+대학교 수업 및 기숙사비를 내게 된다.
세 가지 옵션이 있었다. 2024년 여름학기 코스니까, 현재는 다를 수 있다.
1. 튀빙겐 대학교
- 기숙사(1인실, 공용 부엌 및 욕실): 430-460유로
- 학비: 730유로
=> 총 1160-1190유로 정도
2.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 기숙사: 숙소 및 가격 미정이나 400-500유로로 추정
- 학비: 820유로
3.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 기숙사(1인실, 공용 부엌 및 욕실): 470유로
- 학비: 880유로
가장 저렴한 1번 옵션을 택하려 했으나, 이미 정원이 다 차서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2번과 3번 중 고민하다, 나는 결국 3번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를 골랐다. 사실 프라이부르크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막 신입생이 되었던 시절, 처음으로 들었던 교양 강의 '서양 문화의 유산' 교수님께서 프라이부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어떤 곳이길래 그리도 교수님께서는 프라이부르크에 그리도 애정이 깊으신 걸까? 그 붉은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무너졌지만 시민들의 도움으로 재건에 성공하다니, 차보다 트램이 많은 도시의 모습은 어떠할까,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중세 시절의 수로가 아직도 보존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할까. 이런저런 호기심과 기대를 잔뜩 안은 채 결국 3번 옵션을 선택하게 된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도 궁금했으나, 행정절차 등 속도 면에서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가 나았기에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역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처리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독일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괴테의 유명작 '파우스트'에 나오는 배경지인 슈타우펜을 방문해보고 싶기도 했고. 혼자라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결정한 이상, 해보고 싶은 것들을 나열해 보았다. 생각보다 하고 싶었던 게 많았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결국 나는 인문학 및 미식 기행을 좋아하는구나. 곳곳을 쏘다니며 별미를 맛보고, 그 지역만의 역사를 알고, 문학 또는 영화의 배경지인 곳들을 찾아다니는 걸 좋아하는구나. 나 혼자만의 여행을 준비해 보며 나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되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슈타우펜이라고 하는 작은 시골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소설 속 파우스트가 세상을 떠나는 곳이라고 한다. 숙소가 배경인지라, 숙박도 가능하단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독문학을 전공했지만 파우스트는 아직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정말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지금껏 들어왔던 강의에서 파우스트를 배운 적이 없기도 하지만, 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소설이 아니고 연극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 측면에서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슈타우펜을 향했던 이유는 단 한 문장이 내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로스쿨 진학 및 진로 고민으로 마음이 뒤숭숭한 나를 달래주는 문장이었다. 파우스트가 작품에서 악마든, 뭐든 그 문장은 그 당시 내게 동아줄이었고 그곳을 가야만 하는 당위성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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