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한복판에 조선 9대 왕 성종과 그 아들 11대 중중이 묻혀 있다. 선릉과 정릉 합쳐서 선정릉이라고 한다. 성종 임금은 덕이 많고 학문도 깊어서 세종 다음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25년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큰 변란이 없었고 경국대전과 같은 중요한 규범을 완성해 문치의 틀을 다졌다.
성종이 묻혀있는 선릉
그런데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 무자비한 왕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종 시대에 일어났던 어우동 사건을 먼저 살펴보자. 어우동을 기생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우동은 양반가의 딸이자 세종대왕의 바로 윗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다. 일반인은 쳐다보기도 힘든 지체 높은 집안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왕족인 남편 태강수 이 동에 의해 누명이 씌워져 소박을 맞으면서 조선의 최대 성 스캔들이 일어난다. 어우동은 약 4년 동안 모두 17명과 관계를 가졌는데 세종대왕의 손자, 증손자 같은 왕족부터 병조판서 같은 고위 관리, 심지어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 신분이 다양했다. 또한 두 팔과 등에 연인 3명의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영화 어우동(1985)
사대부가의 부인이 일으킨 이 희대의 스캔들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대대적인 조사 끝에 형이 정해졌는데... 이때 성종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신하들은 법에 정해진 대로 장 100대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곤장을 맞는 대신 돈으로 내는 관행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그리 중한 벌은 아니었다. 그런데 성종은 엄히 처벌해야 한다며 사형을 강하게 주장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어우동은 사형이 언도된 그날 바로 형이 집행됐다. 하지만 연루된 남자들은 무혐의 처분을 받거나 곤장 대신 돈으로 갈음하거나, 수개월의 유배 끝에 복직됐다. 여자에겐 법에도 없는 엄한 벌을 내리고 남자들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을 한 것이다. 법에 의한 통치규범인 경국대전을 완성한 왕이었지만 어우동 사건 처리에서는 극단적인 유교적 여성관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성종은 또한 두고두고 여성들에게 족쇄가 될 만한 법을 제정했다. 바로 과부의 재혼을 금지한 ‘과부재가금지법’이다. 과부가 재혼하면 자식들의 관직 진출을 원천 봉쇄한다는 내용이다.물론 그전까지 과부의 재혼에는 제약이 없었다. 이 법이 재혼한 과부를 직접 처벌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식의 출세 길을 막을 어머니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실제로 큰 효과를 냈다. 처음에는 자식의 관직 진출 가능성이 있는 양반가 여성들에게 효력을 발휘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재혼 자체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다 보니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변란에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성들도 재혼을 하지 못했다. 첩이 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과부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사회적 냉대와 생존의 벼랑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 과부재가금지법은 성종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다수의 신하들이 이 법에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종은 극소수의 의견을 채택해 이 법을 밀어붙였다.
과부재가금지법은 성종의 성리학 원리주의가 여성 정책에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법은 언제 사라졌을까? 무려 400년도 더 지난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그 긴 세월 동안 조선의 과부들이 겪었을 곤경을 생각하면 성군으로 칭송받는 성종이 과연 여성에게도 성군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과부재가금지법이 그 후에도 한국인의 의식에 남겨놓은 뿌리 깊은 여성관을 떠올리면 성종은 이 땅의 모든 여성의 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그렇게 엄격했던 성종은 여자를 멀리했을까? 물론 그 반대다.
세 명의 왕비 외에 후궁 14명으로 조선 왕 27명 중 두 번째로 많다. 성종은 17명의 부인들로부터 모두 16남 15녀를 얻었다. 이 중에 왕이 된 자녀는 폐위된 10대 연산군과 반정으로 왕위를 빼앗은 11대 왕 중종이다. 자식이 많으면 근심도 늘어나기 마련. 그 많은 자녀를 낳은 성종, 놀랍게도 12세에 왕위에 올라 세상을 뜬 나이는 37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