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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Apr 11. 2023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4주년을 맞아

4. 11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 그 길을 따라 걷다


오늘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4주년 되는 날이다. 오전 10시,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어울쉼터에서는 제104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기념식이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황제가 아닌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큰 뜻을 품고 세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다. 해방이 되기까지 약 27년 동안 상하이에서부터 충칭까지 일본의 감시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며 고난의 행군을 이어갔다. 상하이에서 있었던 13년 동안은 거의 1년에 한 번씩 거주지를 옮겨야 했고 항저우, 전장, 난징, 광저우 등 8년 동안의 이동시기를 거쳐 1940년 마지막으로 충칭에 새 둥지를 튼 후에도 광복할 때까지 세 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다. 그 이동 거리는 무려 5000km가 넘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경로




필자는 4년 전 2019년 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방송을 위해 한 역사연구소 답사팀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항주, 난징을 거쳐 충칭까지 임시정부 발자취를 따라갔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비롯해 김구 선생 가족이 거주했던 곳, 윤봉길의사 의거지인 훙커우공원(루쉰공원), 독립운동가들이 묻혀 있던 송경령능원, 군사학교 천녕사, 이제항 위안소(아시아 최대 규모의 일본군 위안소) 등을 돌아보았다.

    

실제로 상하이 임시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으로 청사가 열 번 넘게 이사를 하고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집주인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 구 선생은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아내를 허망하게 보내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어머니의 모습까지 지켜보아야 했다고 전한다. 독립을 위해 어려운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없었던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4년 만에 다시금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4년을 맞아 당시 취재했던 자료들을 펼쳐본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앞

 

자싱의 김 구 선생님이 머물렀던 곳


자싱 김구 피난처


상하이 훙커우 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다. 중국에 우리나라 윤봉길 애국지사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전시관이 있는 것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1932년 훙커우 거사를 치르기 전, 김 구 선생과 시계를 바꾼 스토리가 영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전시관 앞에서 함께 간 일행 중 두 아이를 둔 한 아빠에게 윤봉길의사가 고향의 두 아들에게 쓴 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시를 낭독케 해서 방송하기도 했다. 윤의사와 나이가 비슷한 한 청년은 자신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데 어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용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랍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상하이 홍커우 공원내 윤봉길의사생애사적전시관


난징 천녕사 터에서
난징 천녕사터(조선혁명간부학교 훈련지)

난징에는 항일 무장 투쟁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폐허지로 남아있다. 천녕사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당시  조선혁명 군사 정치 간부학교란 군사 학교가 있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이 주도한 간부학교는 1기에서 3기까지 모두 125명의 청년 투사를 키워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선생이 간부 학교 1기 출신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가져간 몇 가지 음식을 펼쳐놓고 애국 영령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과 <독립군가> 합창의 시간도 가졌다.


난징 이제항위안소 유적진열관


난징에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위안부 유적지인 이제항위안소다. 입구에 있는 임신한 여성의 동상이 바로 우리나라 (고) 박영심 할머님의 동상이다. 벽면에는 70여 명의 여러 나라 위안부 할머니의 사진이 걸려있다.





193711, 일본이 난징을 공격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난징을 떠나 중국 대륙 남서쪽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는 후난 성 장사를 거쳐 광둥 성 광저우와 유주, 기강을 거쳐 1940, 34개월 만에 충칭에 도착한다. 임정 요인들과 가족들의 이동 거리는 약 6천 리(2400 킬로미터), 그야말로 목숨을 건 대장정이었다.           

          

충칭 임시정부청사 전경


1940년부터 194511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5년 넘게 독립을 준비한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정부와 군사 조직을 재정비하고 우익정당 3당이 통합해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고 대일항전을 위한 광복군을 창설한다.



  

어제 4월 10일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시고 뉴욕에 매장되었던 미스터 션샤인의 모델이 된 황기환지사가 100년 만에 고국품으로 돌아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그나마 돌아오셨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이름조차 잃어버린 채 버려진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항일열사공묘에서 답사팀들과 함께

100여 년 전 중국의 낯설 길 위에서 역사를 만들었던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며 다시금 오늘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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