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동리의 겨울

by 김숙희


용동리의 겨울


용동리 마을도 어느새 겨울이 찾아왔다. 지난가을 황금물결로 출렁이던 넓은 들녘은 면도를 해 놓은 듯 논바닥이 가지런한 수염 모양을 이루고 있다.

마을 곳곳엔 김장이 한창이고 하늘에서는 바람을 타고 눈발이 흩날린다.


“까륵까륵 까륵까륵” 기러기들이 v자 모양으로 무리를 지어 온다. 맨 앞서 인솔한 기러기가 인상 깊게 보인다. 아마도 서열 1위인 것 같다. 우리 집도 텃밭에 심어둔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하였다. 우리 부부, 그리고 아들과 딸네 김장을 풍족하게 해치웠다. 며칠 후, 마을 이장님 어머니께서 부르셔 나가 봤다. 맛있는 김장김치를 들통으로 가득 가져오셨다. “우리 밭에 배추가 남았으니까 필요하면 더 갖다 해요.”하신다. 도시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포근한 정이 마음을 감싸 안았다.

겨울 찬바람이 매섭다. 그렇지만 햇볕만큼은 유리창을 통과해 따사롭게 방안을 비춰준다.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를 한 솥 쪄서 남편과 함께 김치를 곁들여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추운 겨울이 오면 미각을 행복하게 하는 또 하나의 별미를 빠뜨릴 수 없다. 마을분이 주신 럭비공 모양의 슈퍼 단 호박이다. 호박을 푹 고아 팥과 밀가루를 덩 글 덩 글 뭉쳐서 만든 풀대 죽은 정말 맛이 기가 막혔다. 배추, 무, 배, 도라지 고춧잎 삮인 것 등 여러 채소를 섞어 즙장을 만들어 봤다. 전통 장류인데 남편의 추억을 사로잡는 음식이다. 과연 그 맛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처음 만들어 봐서 기대는 안 하게 된다.

마을 어르신들도, 모든 들녘도, 지금은 휴식 중이다. 마을 회관에 모여서 어르신들은 10원짜리 내기 화투 유희로 열띤 모습이다. 봄과 여름, 가을을 숨 가쁘게 농사일만 하신 그분들에게는 마땅히 누려야 할 보상이다. 그 분주했던 모습들은 자취를 감추고 마을은 적막감에 을씨년스럽다. 점심을 먹은 후 여느 때처럼 잘 정비된 농로를 따라 운동을 나갔다. 푸드덕하고 날아가는 두루미와 몇 마리 산비둘기들이 논에 먹이를 먹고 날아오른다. 용동리의 너른 들녘을 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자연 속에 내가 있음이 행복하고 감사하다. 귀농해서 나름 바쁘게 살았다. 책 한 권을 끝내는데 한 달 이상이 걸렸다. 농촌 환경에 압도되어 나날이 바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울이 가져다준 한가로움을 환영한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으며, 겨울이 주는 행복을 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