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보내고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저만치 거리를 느꼈던 가을이 알게 모르게 가을 옷을 입고 찾아왔다. 고요함 속에 아침 안개가 피어나는 시골마당에는 주렁주렁 대봉감들이 풍요로움을 한가득 싣고 풍성함을 안겨준다.
드넓은 들녘에 일렁이는 황금물결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올 해도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의 마음을 드려본다. 사계절을 만나는 창문 액자는 가을이라는 아름다운 자연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고 자연 안에 내가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며 세파에 시달린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도로가에 심겨놓은 코스모스의 하늘거림은 여러 색상의 화려한 옷을 입고 가을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코스모스를 보기 위해 지난여름부터 그렇게도 기다렸다. 코스모스는 제일 좋아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귀촌해서 화단에 가득 심어보고 싶었던 일이었지만, 다른 꽃들의 차지로 아쉽게도 밀려나고 말았다.
약용으로 사용되는 돼지감자에 꽃이 핀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노랗게 피어있는 꽃에 눈길이 머물렀고, 자세히 봐야만 예쁜 꽃이었다. 이 꽃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못 받은 탓에 화단에 있지 않고, 둔덕 어디엔가 쓸쓸한 모습으로 바람을 따라 외롭게 흔들대고 있었다. 어느 꽃 못지않게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옷을 입은 돼지감자는 촌스런 이름과 달리 예쁜 꽃이었다. 혹여 돼지감자 꽃을 향해 “이 꽃도 꽃으로 들어가니?”라는 야유는 삼가시라.
(돼지감자 꽃)
가을이 오면 억새풀은 약방의 감초와도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가을 옷을 입고 나타나서 무성하게 둔덕을 이루며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건들대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멋지다. 억새풀밭에서 사진 몇 장 찍어두고 몇 개 꺾어다 화병에 꽂아두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선풍기를 의지하며 늦더위를 식혔건만, 계절의 순환을 따라 사람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여름 내내 입었던 반팔은 장롱 속에 고이 모셔놓고 긴팔로 갈아입었다. 가을을 타는 것일까. 마음이 쓸쓸해지고 어디든 떠나고 싶어 진다. 주말에는 추억이 머무는 곳으로 발길을 따라가봐야겠다. 그곳에 가면 변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남아있는 추억들이 몇 개 있을 거다. 잘 더듬어 보고 그리움을 달래고 돌아와야지. 풍요로움과 쓸쓸함이 교차하는 가을은 머무는 시간이 너무 짧다. 이 시간이 가기 전에 마음에다 가을 옷을 충분히 입혀주고 가을의 정서를 행복하게 누려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