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떡은 80세가 넘으신 마을 어르신입니다. 이분이 살아오신 인생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성군에는 방장산이 걸쳐있다. 그 골짜기에서 시집오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비록 방장산 밑에서 살았지만, 다른 집들은 겨죽을 먹고살았을 때, 그래도 우리 집은 보리밥과 서숙 밥(조밥)은 배불리 먹었었다.
봄이 되면 친구들과 방장산에 나물을 뜯으러 갔었고, 우리 어머니는 도시락을 무명베 조각에 보리밥과 김치, 참기름으로 버무린 소금 반찬을 싸주셨다. 하지만 내 도시락은 입에 넣어보지도 못했다. “니 밥은 맛나겄다. 니 밥은 맛나겄다.”하며 친구들이 한 숟가락씩 모두 빼앗아 먹었기 때문이다. 내 도시락을 빼앗아 먹은 친구들은 쑥 한 줌 뜯어서 내 자루에 넣어준 일이 없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내 자루에 쑥을 보탰었다.
1950년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6.25가 났다. 여기서 잠깐 거슬러 올라가 6.25가 나기 전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 아버지는 이북을 올라 다니며 무명베를 파셨다. 얼굴과 손발만 빼고 온몸에다 무명베 다섯 필을 칭칭 감고 이북을 다니시며 파셨다고 한다. 여기서 한 필 값이 거기서는 두 배를 남기는 이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집을 짓게 되었다. 그런데 이북에서 임노일이란 덩치가 큰 사람을 알게 되었다. 자꾸 고창을 따라가겠다는 성화에 못 이겨, 고창 집으로 데려와 집 짓는 일을 시키게 되었다. 막상 데려와 일을 시켜보니, 일하는 태도는 형편없었고, 큰 덩치에 밥만 축내고 있는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뺨을 몇 대 때려가며 꾸중을 하셨다. 아버지의 꾸지람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애써 지은 집을 다 부서뜨리고, 아버지를 빨치산대령이라고 고발을 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좌익으로 몰려 형무소에 수감이 되었다.
우리 집안에는 사상이 서로 다른 어른들이 계셨다. 할아버지는 우익이었고, 작은할아버지는 좌익이었다. 한집안에서 우익과 좌익으로 대적하는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할아버지가 우익인 까닭에 우리 집은 빨치산들이 나와서 다 쳐부수고 돌아갔다. 그러나 작은할아버지 가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소식도 없었다.
혼란과 두려운 공포가 휩 쌓이던 어린 시절... 이런 일들은 어린 가슴에 남아서 잊히지를 않는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어느덧칠십 년이 흘렀다. 충남대전에는‘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별칭을 가진 골령골 대 학살 사건 현장이 있다. 얼마 전 가족들과 함께 그곳을 다녀왔다. 칠천 명을 잔인하게 학살시킨 그 현장에서 우리 아버지도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왔다. 우리 집은 방장산 골짜기라 보리밥과 서숙 밥이 주식이었다. 중매가 들어온 곳은 부안군 보안면 상입석리이다. 이곳은 들녘이 있어 부자라고 했다. ‘이제 쌀밥을 먹게 되겠구나! ‘하고 부푼 희망을 안고 칠 남매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하지만 부자 집이라는 곳이 집이 낮아 드나들 때마다 머리를 부딪치기가 일쑤였다. 젊어서 고생해 새로 집도 짓고 논도 사고, 자식들은 고등학교까지 다 마치게 했다. 남편은 오십 세 까지 사시고 가셨지만, 지금은 생활에 만족하고 살고 있다.
※부안군 보안면 상입석리 마을 수다방에서 나눴던 신기떡 어르신의 인생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지금은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