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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Nov 12. 2023

특별한 이유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1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를 읽고

무리 생각해도, 사람들은 피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보는 게 맞다.

생물로서 인간은, 아마도 생존에 필요한 조건만 갖추고도 몇 십만 년은 종족을 유지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으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냥 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 그래서 건물을 지었고, 그림을 그렸고, 책을 읽었고, 약을 지었고, 자기소개서를 쓴다. 괴롭기 짝이 없다. 근데 사람은, 그러지 않고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살면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인간의 본성에 걸맞게 스스로 괴로워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정말로 내 도움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겠지. 그들은 그냥 자꾸만 마음 속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들을 누구라도 붙잡고 뱉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이란 십중팔구 두 종류였다. 그들은 무언가가 되지 못해 괴로워하거나, 사랑의 붕괴로 괴로워했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고 당연히 나 또한 겪는 그 두 개의 괴로움은 사실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들이 무언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분명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 증명이란 예컨데 다음과 같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그저 살아가지 않았다. 나는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그런 증명 말이다. ‘인간(人間)‘은 사람 인에 사이 간이다. 인간은 혼자 존재하지만 동시에 혼자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모순에 의해 사람의 마음이란 (슬프게도) 자기만족에 의해 충만해지기란 어렵다. 정말 어렵다. 그런데 타인의 사랑, 누군가 내어주는 그 얄궂은 손길 하나는 놀랍도록 빠르고 쉽게 사람의 마음을 충만하게 한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삶을 살아가도 괜찮아. 그렇게 생각할 만큼 사랑이란, 잔인하고도 강력한 감정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평생 사랑을 갈구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받고 있다고,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갈구한다. 나는 문학과 역사와 경험을 막론하고 인류가 사랑을 위해 위대한 업적이나 이성적인 판단이나 어쩌면 스스로의 생명까지도 버리는 판단을 저지르고, 그것이 또다른 위대함으로 추앙받는 기록을 수도 없이 읽어왔다. 사람의 삶, 증명을 위한 노력은 어쩌면 모두 사랑을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종이에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하려 발버둥친다.’고 쓰고는 그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철학자가 된 것만 같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괴로운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그들이 나에게 스스로의 괴로움을 언어로 구체화해 주었을 때, 스스로 철학자 쯤이 되고 싶어하는 내 건방진 버릇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이었기에, 나는 그 현상 이면에 있는 (내가 생각하기에)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그 시도랍시고 던진 질문은 늘 아래와 같았다.


“너는 네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너는 그게 너로서 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해?”


사실 난 앞서 말한 인간의 사랑을 향한 갈구에 대해서는 그것이 삶의 목적과도 같은 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바로 그 ‘사랑‘이라는, 그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했다. 인간을 불합리로 몰아넣는 사랑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늘 옳을 수는 없는 법이라고 생각했고 그 감정을 늘 경계했다. 그 경계심이란 늘 회의적으로 흘러가서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란 늘 이랬다. 사랑이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저 사람들을 찬찬히 설득하면 사실은 자신이 비이성적 감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인정이나 증명 같은 지겨운 굴레를 위해 저 사람은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게 나라는 사람의 철학 따위였다.


그런데, ‘수브다니’가 거기 있었다.


“무언가를 원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필요할까요?”*

 - 김초엽,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 中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142p)


수브다니, 최수안은 김초엽의 단편소설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의 등장인물이다. 주인공 ‘현이’는 ‘솜솜 피부 관리숍’에서 고객의 피부를 설계하고 배양하는 연구 업무를 맡았으며 수브다니는 피부 관리숍의 고객으로서 등장한다. 피부를 배양한다니? 수브다니가 사는 세계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의 생체 조직을 인공적으로 배양하고 교체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무려 사람의 피부까지 요구에 맞춰 교체가 가능해졌기에 ‘피부 관리숍’은 생명공학 연구소와도 같은 시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체가 교체 가능해지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의 옷이 그러하듯, 신체로도 자신의 개성이나 신념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분명 생길 것이다. 김초엽 작가는 이 상상을 아주 깊이 있게 풀어냈다. 수브다니는 자신의 피부를 금속으로, 그것도 ‘쉽게 녹슬 수 있는‘ 금속으로 바꾸기를 원했고  이 독특한 요구는 현이와 관리숍 사장을 난관에 빠트린다. 위 인용은 도대체 ‘왜’ 피부를 금속으로 바꾸고 싶냐는 질문에 수브다니가 내놓은 대답이다.


사실 ‘무언가를 원하는 데에 이유는 필요 없다’는 말은 로맨스 서사에서 오히려 흔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수브다니가 이 말을 할 때 나는 갑자기 큰 울림을 느꼈다. 보통 피부를 금속으로(심지어 녹까지 스는!) 바꾼다는 선택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고 황당하다. 이 행위의 정확한 이유는 심지어 작품이 끝날 때까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 황당하고도 무식한 ‘이유 없음’이 나를 당황시켰다. 이 당황은 수브다니의 정체에 대한 진실을 하나씩 읽으며 깨달음으로 변화해갔다.


사장과 현이의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수브다니의 삶은 하나 둘씩 조명되는데 우선, 수브다니는 인간이 아니었다. 수브다니의 기존 피부는 인간화 시술을 받은 안드로이드의 피부였다. 수브다니는 ’*기계였다가 인간이 되었다가 이제 다시 기계가 되고 싶은 존재*(책 145p)’라는 것이다. 수브다니의 피부가 ‘진짜 피부’가 아니라는 점은 수브다니의 피부를 금속으로 바꾸는 모험을 가능하게 했다. 다음으로, 수브다니는 인간과 사랑에 빠졌던 존재이다. 현이의 시대와 같이 고도화된 세상에서도 인간형 안드로이드는  단 몇 년간만 생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윤리적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안드로이드, 윤리적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수브다니는 자신을 사들이고 자유를 부여한 인간인 미술계 유명 작가 남상아와 연인 관계였고 함께 작품 활동까지 했다.  그런데 누구의 의지인지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선택에 의해 수브다니는 인간화 시술을 받았고 인간이 된 수브다니는 남상아와 진흙탕 분쟁을 하다가 헤어졌으며 그 후 언젠가 남상아가 죽었고, 수브다니는 남상아의 금속 작품 다수를 훔쳐다 현이의 관리숍에 의뢰해 그것을 녹여 자신의 피부로 만들었다. 수브다니의 삶은 하나같이 설명이 불가능하다. 왜 남상아는 수브다니에게 자유를 줬는가. 왜 수브다니는 기계이면서 남상아를 사랑할 수 있었는가. 왜 수브다니는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는가. 왜 수브다니의 인간화는 남상아와의 이별을 초래했는가. 그래놓고도 왜 수브다니는 다시 기계가 되길 원하는가. 왜, 대체 왜?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이 의문을 풀고 수브다니를 어느 순간부터 이해할 수 있었는데, 다음 몇 구절과 그것을 통해 내게 떠오른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브다니가 바랐던 것이 금속성인지 기계성인지, 남상아에 대한 복수인지, 그냥 수많은 사람들에게 엿을 날리는 거였는지, 그가 정말로 뭘 원했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수브다니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다는 것만은 알아요. 그는 정말로 금속 피부를 달고 싶어했죠. 다른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수브다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예요.

밀려드는 질문들을 저는 멈춰 세웠어요. 이유가 뭐였든 수브다니는 자신이 원했던 걸 얻은 거잖아요. 그러니 이제 더 뭐가 부럽겠어요.

 - 김초엽,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 中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167p, 173p)


작품이 끝나면서 어느새 나는 수브다니를, 그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었다. 그 이유란 무엇일까 천천히 되짚어본 결과 나는 이런 생각이 들게 되었다. 수브다니의 선택은 ’설명‘ 가능하다. 그 선택을 가능케 한 것은 ’사랑‘ 말고는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그리고 사랑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설명 가능하고 완결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의 불합리성과 불완전성을 경계했고 사랑이란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랑은, 원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래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 모순성이 사랑의 완결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래서 사랑하고, 저래서 사랑하고, 스스로 어떤 설명을 갖추려고 하지만 사실 사랑에 이유따윈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설명한다. 수브다니는 남상아와 함께했던, 기계였던 시절로 돌아가보고 싶었을 뿐일 것이다. 사랑의 기억을 자신에 피부에 담은 것이다. 그냥 그것 뿐인 것이다. 사랑에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왜’인지를 물었던 내 질문은 사실은 바보같은 상담 세션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언가에 자꾸만 ‘특별한 이유’를 찾았던 내 고집은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받지 못 할까봐 사랑을 의심하는, 그런 찌질한 인간의 변명을 잘 포장하려고 노력했던 게 아니었나. 느닷없는 성찰도 거쳤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어김없이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 것임을, 그 일에 ‘특별한 이유’는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사랑하는 일은 가치가 없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인간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감히 여기다 적어본다. 나는 이제 사랑이 두렵지 않다. 세상에 존재했던 외국의 한 ‘진짜’ 철학자의 글을 아래에 남기며 글을 마친다.


내가 만일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인간으로 사는 일은 피곤하고 괴롭지만 나는 견딜 것이다. 그것은 모두 사랑을 위함이다.




by.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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