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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Nov 12. 2023

사랑으로의 입문

사랑에 대하여 1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를 읽고

다섯 개의 소설이 전부 사랑과 그 비스름한 것을 다루는 데 골몰한다. 각기 다른 시선 속에서 시선의 출발점에 함께 설 수 있었던 순간은 책의 처음과 마지막을 읽을 때였다. 첫 번째 수록작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에서는 어느 학문의 입론서를 읽은 듯 사랑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수록작 <뼈의 기록>은 학문에 발을 들인 뒤 내 마음에 드는 이론 하나를 발견한 기분으로 읽었다. 내가 남에게 주고 싶은 사랑의 형태 중 하나가 명확한 단어로 드러났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감정 이식이라는 SF 소재를 중심으로 한다. 감정은 필요한 꽤 단순한 절차를 거쳐 사람에게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수진은 성재와의 결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미련으로 변질되어 수진을 괴롭히던 ‘남은 사랑’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힘을 빌려 남편의 외도로 사랑을 잃은 영인에게 그걸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빠져나가고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수진은 다른 남자를 만난다. 둘은 궁합이 꽤 잘 맞았다. 몇 번의 만남을 거쳐 곧 본격적인 연인 관계가 되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결말에서 그 남자가 이별을 겪을 때마다 감정 전이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수진은 혼란에 빠진다. 괜찮다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는 모습으로 소설이 끝난다.


수진의 감정 전이는 여러 상황이 맞물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기르던 반려동물의 치료비가 필요했고, 사랑의 찌꺼기가 자신을 힘들게 하던 와중에 돈을 주고 감정을 가져가겠다는 이가 있으니,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었다. 영인의 남편이 감정 전이의 문제를 지적했을 때도 이성적인 판단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렇게 감정 전이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던 수진이 남의 감정 전이는 껄끄러워한다. 모순적인 부분이다. 그 남자는 아픈 반려동물 정도의 사정이 없어서 그의 감정 전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수진의 불편함은 당연한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이 감정은 누구나 갖고 있으며 누구도 이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 사실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수진의 불편함에 함께 한다. 불편의 공동 체험은 사랑을 비롯한 감정이 그 주인에게서 금방 떨어져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 중요한 사랑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뼈의 기록>은 로비스를 통해 그 방법 하나를 제시한다. 염을 행하는 안드로이드인 로비스가 나온다. 죽음에 깊게 관여하는 기계인 만큼 로비스에게는 다른 기계와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첫째는 헤아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 둘째는 말을 쉽게 하지 않기에 입이 없다는 것이다. 이 특징을 기반으로 로비스는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한다.


로비스와 매일 대화를 나눴던 모미는 잠들 듯이 죽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남긴 유언이 없기에 염을 진행한 뒤 화장해야 했다. 평소대로라면 로비스는 주어진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비스는 헤아렸다. 모미와 함께했던 시간들, 그 시간 동안 기울였던 커다란 관심을 바탕으로 말이다. 그래서 모미가 원했을 법한 마지막을 위해 원래의 절차를 깨뜨린다.


사랑에 빠져 규율을 깨뜨리는 플롯은 진부하지만, 로비스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 건 그 행동의 무게감에 있었다. 잠깐의 강렬한 감정에 휩싸여 저지르는 일탈이 아니었다. 로비스는 모미와 쌓아 올린 관계를 믿고 그 믿음의 크기만큼 헌신했다.


로비스의 속성은 인간이 부여한 것이다. 인간은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행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정해진 대로 행동하는 기계를 통해 필요한 태도가 충족된 관계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인간이 아직 품을 수 없는 묵직한 사랑을 보며 감화되었다. 진정으로 필요한 요소만을 로봇에게 담았다는 설정이기에 그걸 보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듯하다. 헤아림으로써 줄 수 있는 사랑은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궁극의 사랑이 아닐지 싶다.




by.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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