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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an 05. 2024

사랑이 가능한 태도

사랑에 대하여 2 : 최은영 <밝은 밤>을 읽고

사랑이란 게 가능은 한 건지. 내게는 난처한 마음뿐이다.


근래 들어서 스스로가 장력으로 유지하는 물 혹은 아주 묽은 젤리처럼 느껴지곤 한다. 겨우겨우 인간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까딱하면 쏟아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의 한걸음마다 온 힘을 다해 나를 유지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모하였고, 쓰이고 남은 부산물들은 날카로운 파편처럼 흩뿌려지며 나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상처입혔다. 그 과정에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오래된 원망과 온정을 빌미로 몹시 못되게 굴었다는 자각과 자책이 마음의 중력을 키웠다. 차라리 우리에게 감정적 굴레가 없었다면 서로를 상처입히지 않을 텐데. 나는 과연 ‘사랑’할 수 있는가. 오랫동안 습한 마음이 쌓여갔다.


그러한 고민의 날들 중 만나게 된 것이 바로 이 <밝은 밤>이라는 소설이다. 책날개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고 무척 놀랐다. 자신을 “툭 치면 쏟아져내릴 물주머니” 같은 상태였다고 묘사하는 것이 공감대로 닿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소설이 마음에 들 운명이지 않았나,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보면, <밝은 밤> 속에는 다양한 인물과 관계가 얽혀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만, 큰 줄기로 보면 화자인 ‘지연’과 그로부터 위로 4대의 여성이 얽힌 이야기가 된다. 지연은 이혼 후 서울에서 희령으로 삶의 기반을 옮긴다. 희령에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할머니가 살고 있다. 지연은 할머니와 크게 엮이고 싶지 않지만,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되고 엄마와는 별개로 지연은 할머니와 조금씩 교류하게 된다. 지연은 할머니를 통해 자신이 증조모와 매우 닮았음을 알게 된다. 할머니는 일본군의 징발을 피해 증조모가 자신의 어머니를 떠나야만 했던 사연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외가의 이야기를 지연에게 풀어준다. 지연은 할머니와 교류하며 혼란과 슬픔, 상처, 부모와의 깊은 갈등 속에서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과 마주하게 된다. 결말에서는 지연과 엄마가 서로 계속해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가 된 원인 중 하나인, 어릴 때 죽은 언니 ‘정연’의 사진을 함께 정리하고, 지연이 할머니의 단절된 ‘희자’와의 관계를 다시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관계와 상처의 회복에 대한 암시로 끝난다.


지난번 글에서 나는 성애의 유무에 대한 관점 차이를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나의 고민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밝은 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은 동성 인물들의 우정과 연대로 가득 참과 동시에 성애적 의미의 사랑은 (어쩌면 의식적일 정도로) 담백 혹은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어쩌면 기본적으로 작품에서 그려지는 남성 인물들의 태도가 사랑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다만 새비 아저씨는 예외다. 그렇다면 이 예외적 인물에 대해 살피는 것이 사랑이 가능/불가능 해지는 지점을 살피는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새비 아저씨는 아내에게도, 친구에게도, 백정의 딸로서 오랫동안 상처 입었던 삼천 아주머니에게도 깊은 애정을 받는다. 이러한 관계성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인간적 선함과 다정함이다. 그는 지나치게 사람을 잘 믿어 몇 배의 행운이 따라주어야 하는 사람이고, 피가 섞이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이던 영옥에게조차 권위를 세우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후자인 권위다. 이는 친구인 증조부와의 대조를 통해 두드러지는데, 당시에 강조되던 남성성의 전형을 가진 증조부는 가정 내를 포함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우월한 지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내와 딸을 통해 끊임없이 확인받고자 하며, 그로 인해 가정 내에서 억압자로서 오랫동안 군림하다 내쳐진다. 그가 딸에게 차라리 나가 죽으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 그에게는 권위의 추락이 주체의 죽음과도 같은 상태였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자의식에 결부돼 있던 것을 보여준다. 증조부가 진정 사랑한 것은 부모 외에 새비 아저씨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남성-남성이 아닌 동등하지 못한 관계는 애초에 사랑이 불가능했단 것을 뒷받침한다.


같은 박해받던 그리스도교 신자의 후손인 증조부와 새비 아저씨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그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가치를 실제로 체화하였는지 아닌지. 이것이 사랑을 논할 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위계 관계에서는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위계질서로 정립된 심리적·육체적·사회적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 속에서 사랑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는 증조모-증조부, 삼천이(증조모)-새비의 관계의 차이에서 잘 드러난다. 증조부와 증조모의 관계는 시작부터 기울어져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될 위기에 처한 백정의 딸을 구해준 양민 남성의 결혼으로 정립된다. 이는 서로의 마음속에 해당 사건과 계층에 대한 공고한 기울어짐을 만든다. 증조모는 부채감, 증조부는 피해 의식으로 묶인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사랑이 없다 못해 서로를 원망한 채 묶인 부부가 된다.


반면 삼천이-새비의 관계는 시작부터 그 비대칭에서 탈피한다. 백정의 딸이라 늘 차별받은 삼천이를 하나의 인간적 존재로 대우하는 새비에게 삼천이는 사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마음의 빚이 될 사건을 서로 주고받으면서도, 증조부와 달리 그것을 서로에게 휘두르려 하지 않고 그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애쓴다. 물론 서로에 대한 부채 의식이 없는 것도, 두 사람이 완전히 동등한 크기의 온정을 교환한 것도 아니지만, 두 사람은 수평적 관계로 출발하여 그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고 안아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우애는 책을 통틀어 가장 이상적인 사랑으로 그려진다.


위계를 세우지 않는 것. 다른 말로는 손익을 따지며 서로의 위로 올라서려고 하지 않는 태도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랑에 대한 고민을 완결 낼 수 없게 한다. 먼저 모든 것이 교환 가치에 의해 상품화된 현대 사회에서, 타인 위로 올라서려는 태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미덕 혹은 기본형으로서 습득된다는 점이다, 도무지 21세기 자본주의 한국에서는 사랑이란 것이 가능할지 미지수다. 더욱 어려운 점은, 이것이 사랑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란 것이다. 위계를 세우지 않고 동등하게 상대방에게 다가가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전히 어렵다. 글의 서두에 던진 내 질문에도 답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밝은 밤>을, 이 글을 사랑에 대한 어떠한 완결성을 갖춘 말들로 정리하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이 책은 너무나도 많은 사랑이 담겨 있고, 내게는 이 거대하고 습한 이야기를 제련해 낼 재간이 없다. 사랑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한 방어, 그리고 사랑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내려놓고 보다 열린 마음과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상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태도가 일단 내게는 필요하다. 휘두르고 휘둘리는 관계에서 벗어나, 중심을 잃지 않되 멈추지 않을 수 있도록. 나의 마음에 천착하지 말고 사랑의 가능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by. P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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