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형태소 Jan 05. 2024

곁가지 사랑이야기

사랑에 대하여 2 : 최은영 <밝은 밤>을 읽고

사회의 ‘평범한’ 기준에 드는 것은 참 어렵다.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는, 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주어지는 기준점에 대한 시험은 인생을 걸쳐 통과해내야 하는 커다란 시험일지도 모른다. 학교에 다니고, 대학교를 진학하고, 취업하고, 결혼을 하여 하나의 단란한 가정을 만드는 것, 그 이후에는 자녀를 낳고 키우고, 좋은 곳에 보내고, 좋은 가정에 보내는 것. 이 모든 과정을 거칠 때마다, 우리는 많은 인연과 이별하고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어쩌면 “완료”된 시제일지도 모른다고. 지연의 전남편의 말처럼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는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미 완료된 시제를 살아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별은 필연적이고 내가 맺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도 언젠간 희미해질지도 모른다고. 그러다 보면 문득 슬퍼진다. 문득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별할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먼 미래, 멀어지고 데면데면해진 우리를 상상하기도 한다.


최은영의 <밝은 밤>에는 지연을 주인공으로 하여 지연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지연으로부터 가장 먼 사람부터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하고 희령에 있는 연구소로 발령받아 내려온 지연은 아파트에서 오래 연을 끊고 지냈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와 조금씩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연은 할머니의 증조할머니,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증조할머니부터 이어진 인연들의 이야기가 중점이 되어 대를 이어간다. 증조할머니인 삼천과 새비의 첫 만남과 전쟁과 가정으로 인해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 할머니인 영옥과 새비의 딸인 지희의 어린 시절과 영옥이 가정을 이루고 지희가 대학교를 간 후 멀어지게 된 날들, 그리고 다시 한집에서 살았던 이야기. 이후 엄마인 미선과 죽은 언니 정연 그리고 지연, 이 셋의 이야기까지.


사회의 기준을 충족시켜주는 ‘남편’의 존재, ‘남성’의 존재가 사라지고 흔들릴 때 이들은 다시 만나고 서로를 지탱해준다. 비슷한 삶을 살아왔기에, 같은 삶을 살지는 않았어도 서로를 품고, 또 포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폭력과 사회의 편견에도 끈끈하게 연결되고 끊어지더라도 다시 드문드문 이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이별과 외로움이 있을 앞날에 위로가 되어준다. 전쟁과 가정으로 멀어져야 했던 삼천이와 새비가 결국 다시 만났듯이, 가는 길이 달라 점차 멀어졌던 희자와 영옥이 지연의 메일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듯이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기준에서 탈락될 때 나를 지탱해줄 사람이 있는 이야기. 사회의 기준을 맞추려고 덜덜 떠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의 기준에서 탈락했을 때 서로를 힐난하고 경멸하며 등 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지독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등 돌리고 고독하고, 외로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럼에도 얼마나 여성들끼리 지탱하며 나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 그런 곁가지로 소비되던 ‘사랑’ 이야기가 필요했다. 초등학교가 그랬고, 중학교가 그랬고, 고등학교가 그랬듯, 대학교를 졸업하면 더 이상 한 공간에서 같이 수업을 들을 일도, 시간을 굳이 내지 않아도 함께 붙어 다닐 일도 사라질 것이다. 만일 취업하고, 만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점점 시간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세상을 멈출 수 없고, 삶을 멈출 수도 없다. 그러기에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어떤 기준에 적합하기 위한 허들을 넘으면서 점점 우리는 멀어지거나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따뜻하게 알려주듯, 부부의 연보다 끈끈한 친구의 연이 있듯, 서로를 기억한다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만났을 때 그러한 ‘곁가지 사랑’으로 서로를 지탱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기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결코 외롭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멀어지고 끝이 아니고 다시 가까워지기도 할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끈끈하게 연결되는 ‘사랑’도 있다고 말이다.




by. 베가

작가의 이전글 사랑이 가능한 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