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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an 05. 2024

백년을 돌아서라도 우린 돌아가자

사랑에 대하여 2 : 최은영 <밝은 밤>을 읽고

내가 겪어온 가족은 본디 애틋하고 미주알고주알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정도의 유일무이하게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 책 속의 가족은 그런 모습도 한편 아예 몇십년간 왕래를 끊기도 하고, 서로 어색해 존대를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도 잠시, 그들의 대화를 듣기만 해도 읽는 내가 칼로 베이는 기분이다. 서로 상처를 입으면서도 곧장 사과를 하고 필요한 일이 생기면 달려오는 것이 영락없는 사랑이다. 서로를 지극히 아껴 내뱉는 말이 가시가 되고, 그럼에도 찾을 수 밖에 없고, 서로를 위해서라면 거리를 두어야만하는 이 관계는 아무리해도 사랑이라 나는 이 책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기로 했다. 마냥 따뜻하기만 한 말과 애정을 주고받는 것이 아닌 슬픈 이야기가 되려 100년을 돌아 슬픔에 젖어 무너진 나 '지연'을 위로한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지연과 그녀의 엄마 미선, 고조모를 버리고 나온 증조모 정선(삼천)과 그의 딸이자 지연의 할머니인 영옥 이 네 사람의 삶과 슬픔이 얽히고설킨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그녀들에게 우정이 그 숨을 불어넣어 준다. 사람이 기대며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강점기 시대를 살아온 정선은 백정이다. 이제는 없어져 현 시대의 우리는 뼈깊숙이 이해할 수 없는 신분제도의 밑바닥, 백정이라는 꼬리표가 고개를 들고 세상을 궁금해하는 정선에게 돌을 던졌다. 보호받을 구석이 없으면 트럭에 잡혀가는 비극적인 시대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정선을 데리고 개성으로 내려와버린 희수는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보상을 그녀에게 떠넘기며 바라며 미워했다. 삼천에서나 개성에서나 홀로였던 정선에게 새비는 유일하게 삼천이라 부르며 가장 따뜻하고 고운 애정을 퍼주었던 친구였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라며 인간에게 기대하기를 체념한 정선에게 새비는 기대게 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둘은 딸을 같이 낳고, 개성에서, 6.25전쟁의 피난길 대구에서 꼭 붙어 지낸 정선의 딸 영옥은 새비의 딸 희자와 가족과도 같은 사이였다. 물리적 거리가 척력이 되어 둘 사이는 멀어졌지만 남은 생애 동안 두고두고 떠오르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보고 싶은 사이가 되었다. 영옥은 아버지 희수로 인해 중혼한 남선과 아무것도 모른 채 혼인을 하게 되고 딸 미선을 뺏기지 않기 위해 호적을 넘겼다. 실체 하진 않지만, 허울로 있던 아버지를 두고 살아온 미선은 ‘평범’을 고수하였고, 이는 그녀의 딸 지연에게까지 강요되어 둘 사이에는 매번 상처가 남는다. 지연은 평범하려다 망가져가는 본인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로 할머니와 좋은 추억이 있던 희령에 내려왔고 그곳에서 할머니를 마주하며 그녀의 할머니 정선의 이야기부터 듣게된다.


참 웃긴 일이다. 평범은 누가 정한 것인지, 보통의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임과 동시에 조금만 파고들면 그 누구도 평범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보지않으면 알 수 없고 보아도 알 수 없으니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다. 그 '평범'으로 인해 네 세대의 모녀는 상처를 입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상처는 대물림되고 가장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을 서로에게마저 상처를 주고 받는다.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심지어는 배우자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언제나 안길 수 있는 품은 소중하다. 네 인물들에게도 안길 수 있고 안기고싶은 대상이 있어 모두 생의 끝까지 따뜻함을 갈망하며 살아가고 있지않을까.

그렇다면 그냥 가서 안기면 될 것을 왜 그들은 망설일까.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가.


애석하게도 ‘사랑’하는 대상에게 우리의 시간은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단순히 과거-현재-미래가 되어 그 모든 사건들을 넘길 수 없다.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은 하나의 대상이 되어 그 인물을 표현하는 정체성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마냥 미움을 줄 수도, 애정만을 줄 수도 없다. 자꾸만 과거의 미움이 치고 올라올 때면 더 큰 상처를 입힐 방법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내가 힘이 들때면 언제고 가고 싶은 따뜻한 집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랑은 보다 이 관계를 복잡하게 만든다. 하고픈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고 말의 방향을 괜히 꺾어보낸다. 아무리 하기 싫어도 관계 속에 사랑이 끼어들면 우리의 시간선은 바뀐다.


이를 마치 우주에서 아무것도 아닌 먼지라는 사실에 기뻐하는 지연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나는 괜스레 생각해본다. 단선적인 시간을 뚫고 매 순간마다 새롭게 기억되는 감정과 추억의 선들이 그 마음을 준 이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뻗어나가게 되면, 그렇게 되면…. 아마 인류가 이 우주에서 영영 사라지고 기억조차 못 할 종족이 되어도 그것만큼은 남지 않을까. 어느 물리학자가 듣는다면 기함을 토할 정의겠지만 그래서 사랑이지 않겠는가. 불가능해 보여도 누구도 예상 못 할 용서를 해내고, 전쟁 같은 생애를 뚫고라도 지켜낼 사랑을 그 누가 정의해버린단 말인가. 이것만큼은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그저 사람과 살붙이고 살아가는 데에 행복을 느끼는 정선, 영옥, 미선, 지연에게 또 그들을 사랑하는 인물들에게 남겨두어도 될 과제이다.


그래, 이 책이 주는 사랑은 쓰라리다. 누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 사랑해도 채 50년을 사랑해주지 못하는데 당장 가서 체에 고르고 고른 말만 해줄 수 없는 사랑이 쓰라리다. 비유하자면, 요즈음 유행한 리들 샷 같다. 세럼의 형태로 생겨서 피부에 바르면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바늘이 쓰라리게 붙는다. 그렇게 속을 파고든 바늘이 피부를 더 매끄럽게 만들어준단다. 나는 대체 왜 굳이 애써 바늘을 얼굴에 바르는지, 상처를 내서 좋은 피부를 얻는다면 그 상처는 어떻게 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족이 그렇다. 가장 아낀다 여겨왔고 이제는 보기도 어려워진 친구가 그렇다. 함께 지내온 세월과 감정만큼 이미 스며든 바늘은 어찌할 수 없고 따갑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한숨이라도 더 살게 한다면,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한다면 그냥 이것만으로 사랑인가보다. 사랑이란 그리 대단한 영화 속 장면만이 아니라, 매일같이 클래식음악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출 수 없고 원하는 무엇이든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이 책처럼 돌고 돌아 내 후대에 내 사랑이 전해지지 않을 개연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그렇다하더라도 내가 지금 저버려 100년이 넘도록 다신 말 한번 못 붙일 시간 속에 우리가 있다면 차라리 지금 더 많이 사랑하고자 한다.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떨어지면 애틋할 사이인 걸 안다면 주저할 필요 있겠는가.




by.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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