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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an 05. 2024

기억을 기억하는 사랑

사랑에 대하여 2 : 최은영 <밝은 밤>을 읽고

서른 둘의 지연은 지친 나날을 뒤로 하고 옛 고향 희령으로 온다. 도망치듯 떠나온 이곳에서 할머니를 만나게 되며 자신은 알지 못했던 증조모와 조모, 그리고 엄마의 과거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가깝고도 먼 그들에게서, 다른 듯 닮은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밝은 밤>에서의 사랑은 ‘기억’이다. 희령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 지연은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천문학 연구원이었던 지연은 우주란 너무나도 넓고 그 무엇도 기억할 수 없는 곳이며, 자신은 누구에게도 기억되고 싶지 않다고, 그것이 인간의 필연적 결말이라고 믿었다.  그런 지연은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먼 옛날 지워졌던 이름들이 할머니의 입에서 지연의 입으로, 할머니의 마음에서 지연의 마음으로 이어지며 생생히 되살아난다. 지연은 새비 아주머니를 그려보며 ‘행복한 사람이었겠다’고 말한다. 할머니 역시 그랬다. 세상 모든 사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 박복하다 말했지만, 새비를 기억하는 그들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새비의 삶을 미련하다 말하지 않았으며 쉽게 동정하지 않았다. 지연은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일본으로 떠났을 새비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해주었다. 할머니의 뒤를 졸졸 따르던 희자의 모습을 떠올려주었다. 할머니의 기억이 지연의 기억으로 이어지며, 잊혀졌던 그들은 희령에서 다시금 살아났다.  지연은 그 많은 기억 속에서 엄마를, 엄마의 엄마를, 엄마의 엄마의 엄마를 만났다. 증조모의 치열했던 삶을 헤아렸다. 할머니의 슬픔을 목격했다. 죽음을 이겨내야 했던 엄마의 과거를 마주했다. 누구에게도 기억되고 싶지 않다던 지연은, 기억이라는 행위로 사랑을 만났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기억해주기로 한다.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래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물리학의 관점에서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는 말을 본 적 있다. 우리는 찰나의 순간을 살다가, 다시 죽음이라는 가장 자연스러운 원자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이다. 희령에 머물렀던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에 대한 그 모든 기억과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지연이 들여다보는 우주 어딘가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여름 무렵 희령의 하늘은 여섯 시에도 환하다. 푸른 빛에서 우윳빛으로, 분홍빛과 주황빛으로, 이내 감청빛으로 서서히 변한다. 하나도 걸릴 것이 없는 밝은 밤을 그려본다. 기억하고 싶은 여러 얼굴이 지나간다.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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