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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9. 2022

흰 빛의 미래

4월 : 꿈꾸는 미래

미래라는 시간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기존 시간의 도식에서 벗어나, 과거는 기억의 현재이며 현재는 현재의 직관이며 미래는 기대의 현재라고 정의했다. 즉, 기존의 도식보다는 이 세 가지의 시간성이 결국 현재와 연관되어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결국 미래는 현재 속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대’에 가깝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미래가 기대의 현재라면, 내가 명명한 미래는 무엇인가. 누군가는 미래를 깜깜한 어둠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하얀 도화지와 같은 것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렇듯 미래라는 시간성에 대한 사람들의 정의는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성인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명명하고 있는가.

나는 언제나 미래에 대해서 표현할 때, ‘흰 빛’이라는 수식을 즐겨 쓰곤 했다. 미래를 생각하면 늘 흰 빛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무런 색도 투영되거나 스며들지 못한 흰 빛이 마구 쏟아지는 시간. 눈이 멀 것만 같은 환함. 오히려 어둠보다도 더욱더 캄캄한 형태의 빛이 쏟아지는 순간. 그것이 바로 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미래라는 순간성의 본질 또한 흰 빛의 형태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줄곧 해 왔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미래, 즉 ‘흰 빛’의 미래는 구체적으로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을까. 이 ‘흰’이라는 색채 이미지와 ‘빛’이라는 상징은 어떻게 미래와 맞닿아 있을까.



 빛의 미래

미래의 ‘이미지


본래 하얀색은 깨끗함, 순결함, 순수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하얀색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 즉 ‘無’를 뜻하기도 한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성 중에서 미래는 유일하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적 도식 속에서 선행되는 과거는 이미 완성된 그림이자 인화된 사진이다. 완결된 순간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고 그것들을 다시 기억하는 방식, 즉 그것들을 응시하는 방식으로만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제 그림자를 보기 위해서는 언제나 뒤를 돌아보아야 하듯이,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언제나 현재를 관통하고 난 후에아먄 볼 수 있다. 이것이 과거의 특성이라면, 현재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과정, 즉 미완성된 그림에 가깝다. 대략적인 스케치가 완성된 그림 위에 붓으로 색채를 입혀 나가는 순간이 바로 현재이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는 무언가가 가득 차 있거나 채워 나가는 중인 시간적 배경에 가깝다.

하지만 미래는 다르다. 미래는 아직 아무것도 그려 넣지 못한 백지와 닮아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이 그려질지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하려고 머릿속으로 구상을 하더라도 실제로 붓을 쥐고 그림을 그려나가고 난 후에는 전혀 다른 그림이 완성되어 있듯이 말이다. 현재에서 바라보는 미래는 아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이자 어떤 것이 벌어질지 모르는 무의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미지가 갇혀 있거나 펼쳐지고 있는 과거와 현재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미래의 순간에는 언제나 관념적인 ‘나’라는 존재가 위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만 존재한다. 심지어 ‘나’의 존재조차 저 끝없는 무의 순간에 실재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무’를 잘 함축하고 있는 것이 흰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 서술한 미래의 성질과도 맞닿아 있기에 ‘흰 빛’이라는 수식 중에서 ‘흰’이라는 빛깔을 선택했다. 그리고 미래와 흰 빛깔을 연관한 것은 나의 창작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목련들은 예언이다,

라는 문장을 쓰자 봄볕이 목련나무를 비껴간다


새 학기 전날 꺼내 놓은 흰 실내화처럼

가냘픈 나뭇가지마다 목련이 걸려 있다

흰 꽃잎과 꽃잎 사이를 엿보면

교문을 넘어가는 봄의 첫날이 펼쳐진다


등굣길 가로수들은 목련으로 봄을 예감하고

겨우내 얼어붙은 다리를 뻗는다

종소리에 맞춰 빨라지는 발걸음과

무성히 피어나는 푸른 나뭇잎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생각하면 목련처럼 하얀 도화지가 떠오르고

다가올 계절을 예언하는 꽃이 흰 이유는

어떤 나날이 물감처럼 깃들지 몰라서,라고 적을 때

숱한 발자국들이 꽃잎 위로 덧칠되는 기분


뭉툭한 꽃잎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늘 다르고

교문 앞에서 늘어지는 걸음 같은 미래,

한 잎, 한 잎 꽃잎 점을 쳐 보면

어느새 발밑에 갈변된 하루가 있다


모든 예언은 빗나감으로써 완성된다

커다란 흰 목련꽃이 바닥 위로 툭툭 떨어지고

실내화 밑창에 짓뭉개진 꽃잎이 묻어날 때

비로소 봄은 또 다른 미래가 되는 것이다

- 창작 시, 「목련이 가늠하는」


“내일을 생각하면 목련처럼 하얀 도화지가 떠오르고 // 다가올 계절을 예언하는 꽃이 흰 이유는 // 어떤 나날이 물감처럼 깃들지 몰라서,라고 적을 떄 // 숱한 발자국들이 꽃잎 위로 덧칠되는 기분”이라는 구절에서 나타나 있듯이, “내일”은 “하얀” 도화지와 연결되고, “다가올 계절을 예연하는 꽃”인 “목련”이 “흰” 이유는 “아직 어떤 나날이 물감처럼 깃들지” 모르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흰색과 미래는 어떤 것도 실존하고 있지 않은 ‘무’의 성질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미래와 


어둠을 밀어내는 어둠의 힘으로

캄캄한 흰 빛이 차오르는 새벽

- 창작 시, 「뒤틀린 새장」 , 일부


흰색과 미래가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빛은 미래의 어떤 지점에서 연결될 수 있을까. 우리가 마주하는 빛은 대개 흰 빛깔로서 다가온다. 빛의 스펙트럼을 살펴보았을 때는 일곱 가지 색깔의 나열을 엿볼 수는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실제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순간의 빛은 투명하거나 흰색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이 빛이 지닌 성질은 무엇일까. 빛을 생각했을 때 떠올리게 되는 것은 눈부심이다. 빛이 쏟아질 때, 우리는 저절로 눈을 찡그리거나 눈을 감게 된다. 빛이 쏟아질 때는 무언가를 제대로 응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물체도 또렷이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빛이 우리의 시야를 가득 채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시야를 차지한 빛이 그 어떤 것도 드리우지 않는 백지를 선사할 것이다.

결국 이 빛의 눈부심,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빛의 속성이 미래와 맞닿아 있다. 미래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의 성질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어떤 사건이 펼쳐질지, 또 어떤 순간이 도래할지 알 수 없다. 특히나 그 미래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추상적으로 다가오게 될 뿐이다. 우리의 예측이나 예상은 우연히 미래의 사건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대개 맞아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추측에서 벗어난 순간들이 산발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 우연적인 순간과 사건 속에서 우리는 예상했다는 듯이 안도하기보다는 당황의 포즈를 취할 것에 가까워 보인다. 결국 어떤 것이 일어나거나 발생할지 모른다는 미래의 불완전성이 빛의 눈부심과도 상응한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미래의 불완전성은 그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불완전성과 직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불완전성은 빛이 마구 쏟아지는 순간 속에서 눈앞에 놓인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우리의 맹목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빛의 눈부심만이 미래의 속성과의 유사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빛이 지니는 긍정적이고도 밝은 의미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빛의 눈부심은 우리를 눈멀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빛은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오롯이 응시할 수 있게끔 비춰 주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어두웠던 순간에 불빛을 밝힘으로써 눈앞에 놓인 실체가 드러나듯이, 이 빛은 서서히 우리가 어떤 발자취를 그려나가게 될지 밝혀 준다. 어두웠던 불완전함의 불안 속에서 벗어나, 희망적인 순간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미하고도 막연한 빛의 믿음이 미래 속에 잠재된 것이다. “어둠을 밀어내는 어둠의 힘”을 지닌, 이 “캄캄한 흰 빛”으로 가득 찬 새벽이 도래하듯이 말이다. 미래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미래의 불완전성 덕분에 과거와 현재의 불행과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어떤 사건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미래에는 내가 원하는 순간이 도래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낙관을 낳는 것이다.



 빛의 미래에 다다랐을 때의 


그저 시간을 관통해 나가며…. 어느 순간 흰 빛의 미래에 도달할 그림자를 뒤집어쓴 나를 상상한다. 그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 일기, 「몇 번의 침몰과 몇 번의 사랑」



이렇듯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흰 빛의 미래’이다. 미래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과 그래서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있음, 즉 미래가 지니는 양면적 성질이 이 ‘흰’ 색깔과 ‘빛’이 지니는 의미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빛의 눈부심이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 앞에 놓인 것들을 제대로 응시할 수 없게끔 하지만, 결국 이 빛이 눈앞의 길을 밝혀 주듯이. 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빈 캔버스가 주는 불안함이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다는 희망의 여백을 제공하듯이. 이러한 지점에서 흰 빛은 미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흰 빛의 미래’가 지니고 있는 여러 성질 중에서도 이 막연한 희망과 낙관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싶다.

과거와 현재를 관통해 나가는 나, 어쩌면 “그림자를 뒤집어쓴”상태로 막막한 어둠을 헤쳐 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 이 ‘나’라는 존재가 발을 디딜 ‘흰 빛의 미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지금 현재의 위치한 나로서는 어떤 것도 바라볼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 미래의 불완전성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나에게 쏟아질 흰 빛의 미래는 ‘나’라는 존재를 좀 더 일구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미래는 그저 막연히 두려운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선견하고 대처할 수 있는 시간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불안과 가능성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시간성이다. 여전히 붕대를 두른 조각상처럼 관념적인 미래의 속성을 더듬거리고 있는 ‘나’ 혹은 ‘우리’지만, 묵묵히 쏟아지는 흰 빛을 향해 반쯤은 두려운 마음으로, 반쯤은 설레는 마음으로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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