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형태소 Apr 19. 2022

시와 건축

4월 : 꿈꾸는 미래


꿈꾸는 미래를 주제로 하고 글을 쓰자니 평소에 제가 어떤 이상을 꿈꾸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보통 이상은 배움과 연결이 되고 삶의 방향성이 되기 때문에 현재 공부하고 있는 공간과 시에 관해 써 볼까 생각했습니다. <도시는 만남과 시간으로 태어난다>라는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혹은 그 책을 읽을 때 보이던 차창 밖 풍경이 도심을 벗어난 알록달록한 동네였기 때문일까요. 책을 읽다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자동차가 집 바로 앞까지 오면서 소음이 없고, 안전하고, 녹지가 가득하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공간은 없습니다. 집 앞에 나무가 많고 새소리에 잠을 깨고 싶은 사람은 차를 조금 멀리 대고 걸어와야지만 자동차 소음과 매연에서 벗어나 녹지와 새소리를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집 앞까지 자동차로 오는 것은 편리함이고, 새소리와 나무, 풀이 가득한 공간이 주는 느낌은 편안함입니다.”

이렇듯 편리함은 편안함과 공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편리함과 편안함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봐야 하는 것일까요? 편리함과 편안함이 나뉠 수밖에 없다면 그 공간은 결국 포용성을 갖지 못합니다. 만약 편리함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공간을 찾기 어렵다면 그것이 공존하는 공간이 내가 꿈꾸는 미래가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래’를 떠올리면 당연하게도 ‘사회’가 떠오릅니다. 미래가 가지고 있는 이상성과 벅차오르는 희망 같은 것들이 제가 구성원으로 속해 있고 또 살아가는 사회로 연결되기 때문이죠. ‘사회’하면 또 ‘공간’이 떠오릅니다. 단일의 공간들이 겹치고 이어져 만들어진 게 사회고, 사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은 공간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렇게 생각이 흘러갑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공간은 ‘시를 품은 공간’입니다. ‘공간’과 ‘시’라니... 하며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우선 ‘시’와 ‘공간’을 이야기해 볼까요? 시는 언어를 재료로 만들어지고, 공간은 목재, 철근을 재료로 만들어집니다. 재료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시인의 마음과 건축가의 마음이 있습니다. 시인은 마음을 지반 삼아 시를 올리고, 건축가는 마음을 재료를 통해 형상화합니다. 마음 위에 만들어진 것들은 각기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시들은 차곡히 엮여 시집으로 출판되고, 이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넘어가면서 전달됩니다. 이렇게 전달된 시들은 떠돌이 노래가 되어 사람들의 꿈을 순회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마음으로 전달됩니다. 공간은 우뚝 세워져 사람들을 모읍니다. 작은 문, 큰 문, 좁은 문, 널찍한 문을 열면 보이는 다양한 공간.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 위에 알록달록한 색감을 차곡차곡 쌓습니다. 공간과 시 모두 건축가와 시인의 고민과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표현하는 일, 그리고 전달하는 일은 때론 엄숙하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제가 쓰고 읽는 시와 문학이 추구하는 방향은 포용성입니다. 시를 쓰고 읽는 것은 내밀한 결핍과 우울, 어두운 그늘을 포용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품은 공간’이란 결핍과 우울을 포용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발돋움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공간이 있을 때 비로소 편리함과 편안함이 공존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편리함은 단순히 기계를 통한 시간 단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서 편리함은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그 공간을 이용할 수 있음을 뜻하고, 편안함은 모든 사람이 배제되지 않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소속감에서 비롯된 편안함을 뜻합니다. 그렇게 바라본다면 편리함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희망을 품은 시제 위에 쓰인 도면은 제가 바라는 미래로 가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A blend of steps and ramp at Robson square in Vancouver © Pinterest

비장애인과 장애인 모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계단

경사로와 계단을 구분 짓지 않음으로써 화합합니다



우주로 1216 © vmspace

트윈세대 도서관 ‘우주로 1216’

‘트윈(tween)’은 10대(teenager)와 사이(between)를 결합한 합성어로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 아이들을 의미합니다.



공간은 특별합니다. 공간의 재미있는 성질은 공간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곁에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공간이 세워짐과 동시에 공간은 향기를 갖습니다. 뿜어져 나온 향은 씩씩하게 공간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 갑니다. 그 주변에는 산책로가 생기기도 하고, 그 공간을 가진 구역은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되기도 하고, 또 그 주변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창밖 풍경이 변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릴 때 보이는 풍경이 변하니 결국엔 그것들을 바라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 또한 변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공간은 도시 전체에, 나라 전체에 뿌리를 내리기도 합니다. 공간이 만들어낸 변화는 세월이 지나 결국 허물어지거나 리모델링이 될 때도 여전히 생생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기록된 것들이 역사로 불리고 추억으로 불리듯이, 이것들은 가끔 기록되지 않았음에도 역사와 추억으로 불립니다. 건축가가 키워낸 시제의 이상이 남아 있습니다. 즉 모든 게 사라져 다시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공간은 영향력을 가집니다. 공간은 이런 식으로 사회를 만들어갑니다.

유목을 멈춘 이후로 벽이 발명되었다

그때부터

밟혀서 지워지지 않도록

사람은 기억을 벽에 옮겨 보존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전시를 철거하고 나면

차고 흰 벽에는 못구멍들이 남았다

한 점으로 흘러나오는 벽의 내부

밀도 높은 어둠이 근육이라는 걸 알았다

다음, 다음으로

다른 그림을 걸고 다시

전람회는 열려야 하기에

벽은 회복을 시작하고

통증을 빻아 만든 가루

시간에 불행을 섞어

한 움큼 집어 바르고

모르는 거리에서 몸을 말리면

지구도 지구를 교체하기 위해

재앙을 사용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새벽을 펴 바르며

간밤의 별자리를 문질러 메우는 손

나는 복원되지 않는다

무수하게 뚫고 메우다 보면

처음의 벽은 이미 사라진 벽

우리는 어둠을 갱신하며 서 있다

- 최현우, <회벽>

그러므로 세워지고 허물어지고를 반복하고 도시의 모습이 바뀌는 순간에도, 땅 위에 세워진 단단한 조형들이 일구어낸 미래는 현재로 흘러갑니다. 이는 철골 구조 사이에, 못질 후 난 시멘트를 파고든 구멍 속에 꼼꼼하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집스럽게 홀로 우뚝 존재하는 것이 아닌, 언제든 자신의 곁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공간은 또 다른 생생한 미래를 품고 기존의 이상 위에 착실하게 몸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건축가들은 계속해서 착실하게 거푸집을 세우고, 결핍의 틈 사이로 새로운 희망을 붓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면에 발자국을 찍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가득 기도하며 공간을 올립니다. 이런 미래를 꿈꾸는 일이기 때문에 건축가는 무뎌지지 않아야 합니다. 언젠가 들은 강의에서 시인은 예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시인은 소외되고 아프고 허한 것들을 형형하게 마주해야 하고 계속해서 그것들을 다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축가 또한 예민해야 합니다.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소외되고 아프고 허한 것들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포용할 수 있고,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볼 수 있는 시인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공간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공간에 대한 거창한 설명이 없이도,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그 공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와 조명의 조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바람, 그리고 공간을 에워싸는 향기,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노랫말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 공간을 공간 자체로 만듭니다. 그 순간 공간은 유기체가 되어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는 행간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벽해집니다. 거대한 함축성을 가진 행간이 있기에 독자는 사색할 수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 곱씹을수록 깊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와 공간은 그러기에 침묵합니다. 행간과 공간 가득히 사람을 품고 주도권을 내어줍니다.


저는 시와 공간 이 두 가지를 공부하는 학습자로서, 막 길에 들어선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어떤 숲을 만나고 늪을 만날지 모르고, 이정표는 걷는 순간마다 갱신되어 절 헷갈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걸어온 발자국은 제가 어떤 길로 향하게 될지 보여줍니다. 시를 쓰고 공간을 구상하는 일은,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미래를 담은 저의 시제는 포용성이며, 구상하는 공간은 그런 시제 위에서 세워질 것입니다. 추억을 가득 지고 있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광경과 행동반경에서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약자를 포용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 여성, 장애인이 그 편안함 속에는 없습니다. 편리함이 꼭 서로를 닮은 아파트 단지와 단조로운 건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 거닐며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편리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편안하고 편리한 사회란 무엇일까요? 모두가 한 데 어울릴 수 있는 사회이자 따스한 감정이 녹아든 공간. 늠름한 시제들 위에 세워진 공간. 그 공간을 거닐 때 시가 음악처럼 흘러나오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이 만들어낸 사회가 되길, 우리가 거니는 미래가 되길 꿈꿉니다.





by. 베가

작가의 이전글 흰 빛의 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