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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n 27. 2024

용기를 낼 용기

사랑에 대하여 5 : 마무리하며

  기숙사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지하철 역으로 부랴부랴 들어가서 조금 기다리면 서울 지하철 3호선 열차가 들어온다. 사람들 사이에 꽉 끼어서 지난밤에 온 연락들을 확인하고 답장한다. 좋아하는 가요 몇 곡을 골라 듣는다.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게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하고자 서 있는 상태에서 한껏 자세를 웅크리면 스마트폰 화면을 공양이라도 올리는 것 마냥 공손히 두 손으로 코 앞에 들고 있는 웃긴 모양새가 된다. 웬만하면 신나는 곡을 골라야 한다. 기분을 망치지 않는 등굣길을 위해!


 1시간가량 끝에 나는 또 다른 익숙한 공간인 학교로 돌아온다. 타고난 길치인 나라도 거의 매일 오고 가는 두 공간의 길은 훤하게 외우고 있다. 다만 기숙사가 침대, 옷장, 로션, 햇살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면 학교는 커피, 나무, 바람, 친구들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인문대 카페에서 샷을 하나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주문해서 창 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글을 쓴다. 어떤 내용으로 시작할까 눈을 굴리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창 밖의 잎사귀들을 바라보면 인생은 이런 것 하나로도 충분하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는 꽤나 흐려진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반년이 조금 안 된, 작년 연말에 나는 지인이 세션으로 참여하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러 먼 경기도에 있는 한 아트센터에 간 적이 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클래식 음악 공연이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도 되었다. 1시간 반 가량 분량의 공연에서 3개의 곡을 들을 수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두 번째 곡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었다. 이 곡은 아주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카프리스를 기반으로 한 24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곡이다. 전혀 모른 채로 처음 들어본 이 곡은 빨랐다가 느려졌다 빨라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느려지는 부분, 훗날 찾아본 결과 18번째 변주 부분이었는데. 아름다운 멜로디가 몰아치는 것이 특징으로 이 곡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한 부분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내가 이 곡을 들은 아트센터가 마침 ‘음향 맛집’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나의 경험은 더욱 금상첨화가 되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그 부분을 찾아서 반복해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의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은 아니었지만, 잔잔한 감정이 이 멜로디를 들을 때마다 반복된다. 이것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지난달에는 신촌 대로변의, 테디베어를 콘셉트로 한 카페에 앉아서 양자경 배우 주연의 영화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를 다시 봤다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펑펑 울어버렸다! 카페 구석의 어둑어둑한 자리여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카페 점장님께서 날 발견(?)하셨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웬 남자가 곰돌이들이 웃음 짓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보다가 엉엉 울고 휴지까지 왕창 썼으니 황당하실 법한 일이었다. 영화 속에서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 허무한, 모든 인생과 갈림길과 평행선들 사이에서 주인공 에블린을 구하는 것은 남편 웨이먼드의 “친절함”이고 모든 “찰나”는 소중하다는 호소이며 모든 것의 의미를 되살리는 화해는 증명 불가능한 따스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에블린과 딸 조이의 포옹에서 내가 흘린 눈물이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것 역시도 잘 모를 일이다.


 스스로도 그 원인을 알 방도가 찾기 힘든,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들이 사실은 인생에서 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나는 여러 가지 감정들, 상황들, 관계들을 모두 동시에 느낀다. 나는 어떤 사람은 “야!”라고 부르고 싶고 어떤 사람은 “OO아.”라고 부르고 싶다. 누가 더 소중하고 소중하지 않고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어떤 관계에는 더 격식 없는 언어가 어울리고 다른 관계에는 조심스러운 언어가 어울린다. 나는 어떤 날엔 한 없이 들뜨고 어떤 날엔 밑도 끝도 없이 기분이 추락한다. 그 모든 것에 이유를 붙이려고 시도도 해봤지만 무슨 논문이라도 써야 할 것 같은 벽에 부딪힌다. 무언가를 규정하고 밝혀내는 작업은 필요하고 위로를 주지만 내가 학자가 될 사람은 아닌 것인지 어떨 때에는 오히려 내 수족을 묶는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어떤 사실들, 특히 내 감정과 관련된 문제는 그냥 저 나무는 푸르구나, 저 하늘은 파랗구나 하며 자연을 감상하듯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그 아름다운 침묵을 존중하는 것이 되려 나에게 있어서는 더 나를 편안하게 내버려 두는 일로 느껴질 때가 잦기도 하다.


 사랑은 내가 마주치고 사는 자연 중 가장 강렬하다. 정체도 모르고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녀석이 주변 인물들과 세상에 흘러드는 모양새를 보니 어떤 곳에서는 소중하고 당연하고 순수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파멸적이고 귀찮고 속물적이다. 내가 생기고 사라지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에서 똑같은 자연물(?)인 것 같으면서도 물이 흐르는 방향은 어디로 가든 “그런가 보다”가 쉬운 반면에 사랑이 흐르는 방향은 끝도 없이 찌질하게 쫓게 된다. 아마 보이지도 않고 흔하지도 않고 하필 내가 사람이라서 그런가 보다.


 갈증이 나는 건 그냥 물을 마시면 끝나고 추운 건 옷을 덧입으면 끝난다. 하지만 외로운 건 그냥 관심도, 그냥 사랑도 아니고 각자가 바라는 맞춤 사랑을 제공받아야 끝날 것만 같은 게 사람 마음의(사실은 그냥 내 마음의) 웃긴 점이다. 가끔은 내 심보가 처음에 내가 가졌던 사랑에 대한 의심으로 환원되어서,  ‘아니, 그 맞춤 제작 사랑이라는 건 정말 실존할 수 있는 것이며, 그걸 정말로 받는다면 우린 만족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또 던지기도 했다. 마치 기의를 향해서 한없이 미끄러지는 기표처럼, 아니, 기의가 있다고 믿어서 상상된 기의로 미끄러져가는 기표처럼 ⋯,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게 있다고 이미 확정을 스스로 지어놓고 그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는 미끄러짐을 자의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런 대책 없는 허무를 벗어던지겠다고 글까지 썼는데 줏대도 없이 흔들거린다. 이래서 어설픈 신념이 무섭다고 하나보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은 “사랑하고 실연하는 편이 낫다, 전혀 사랑해 보지 않는 것보다는.”이라고 했다고 한다. 앞에 구구절절 내 삶의 모습을 늘어놓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 글을 나는 ‘난 이렇게 쉽고 자연스럽게 감정들을 느끼고 이유도 없이 수용하는 사람인데, 사랑은 유독 회피하고 구구절절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재확인시키기 위해 쓰는 것이다.  난 나에게 관심을 표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큰 이유를 스스로 만들지 않고 밀어낸 적이 많다. 사실 나는 그냥 사랑이 무섭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에둘러 표현하는 버릇까지 있다. 책을 읽어서 여러 이야기를 만났고 글을 써서 나의 내면도 여러 번 만났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나의 결론은 늘 “일단 후퇴!”였다. 어쩌면 굉장히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뭐라도 해라 인마!라는 내 대타자의 요구에 드리는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내가 산중에 틀어박혀 물은 물이로다 염불을 외며 살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 생각에, 나는 일단 느껴지는 것을 느껴야 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쓴 글에서 언급했던 ‘Just Do it’이 다시 생각난다. 사랑? 우리가 논문을 쓸 게 아니라면 생각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느껴지는 감정 중 사랑이라고 분류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게 정말로 사랑이라고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그 사랑은 반박의 여지없이 내게 완전한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은 용기의 문제이다. 물론 그 사랑의 대상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슬프다고 분류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19세기 영국 아저씨가 말하지 않는가!



by.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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