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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Nov 05. 2023

골바람 부는 계절

산골 일기

골바람 부는 계절


평촌리에서 산지도 여덟 해, 길을 무시하고 마당 끝에서 곧장 걸어간다면 쇠판리 팔석정이 나올 것이다.

팔 년 전 팔석정의 너럭 바우와 지금 너럭 바우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나 소나무는 해가 다르게 달라진다.

하긴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던 소나무가 그 자리에서 풍상(風霜)을 겪은 햇수도 내 나이 몇 곱절은 족히 될 테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조선 초 경기도 포천에서 나서 글씨로 이름을 날렸던, 바우에 글씨 새기기를 좋아했다던, 금강산에 반하여 너럭 바우에 여덟 글자를 새겨 놓고는 호(號)를 금강산의 여름 이름인 봉래(逢萊)로 지은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가는 길에 여드레를 머물렀다 갈 정도로 반했다는, 너럭 바우에 여덟 글자를 (또) 새겨 놓고 마을 이름을 자신의 호를 따서 봉평이라 이름 지었다는 설(說)이 있는가 하면, 팔석정 언저리 봉평 판관으로 와서 무려 18년을 살았던 이원수의 아들 죽곡(율곡의 맏형)이 정자 한 채 지어놓고 무시로 쉬러 갔다설이 있는,

어쨌거나 그때도 소나무는 있었을 것이니까.



어릴 때, 팔석정 제일 높은 곳엘 동무들과 올라간 적이 있었다.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물, 푸른 연꽃이 피는 돌 연못(石池靑蓮)이라 불렀을 곳을 우리는 소(沼)라고 불렀고, 소는 이무기가 용이 돼서 올라간 전설이 있는 곳으로 알고들 있었다.

소나무를 잡고 아래를 내려보면 푸른 연꽃이 피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무기가 용이 돼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꿈틀대는 것만 같이 푸르다 못해 시커멓게 보이는 물을 보고 있으면 더 깊은 속으로 휘휘 돌며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오금이 간질거리며 아찔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커먼 물에 잠긴 바위는 쪼개졌다 다시 붙은 듯 바위와는 다른 빛깔의 구불구불한 선은 소나무가 있는 곳까지 뻗어져 있었고 우리는 그걸 이무기가 용이 돼 하늘로 올라가면서 남긴 흔적이라고 믿었다.


그런 바위에서 뿌리를 박고 살았던 소나무가 시나브로 허공으로 흩어져가고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두어 개의 구멍은 있어도 키는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 컸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제법 굵은 가지도 몇 개 됐었는데 이젠 몸통만 남은 데다 키도 많이 작아졌다. 비바람 골바람 맞으며 살아온 세월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 골바람이 우리 마당에도 들이닥치는 계절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마치 팔석정 너럭 바우에서 휘돌던 바람이 버덩(평평하고 너른 곳) 마을을 돌아 마을 끝 율곡교를 왼쪽으로 꺾어 돌며 평촌교를 가로질러 우리 마당으로 들이닥치는 것만 같다. 몇 번 재주넘기를 한 세찬 바람은 저 윗 밭으로 가거나 사과 농원으로 갈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울 마당에서 심술을 몹시 부릴 때도 있다.

양철 지붕을 뒤 흔들거나 아예 뜯어다 남의 밭에 펼쳐놓지를 않나, 마당 만한 천막을 달싹 들어다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가 몇 시간 뒤 내려놓지를 않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봉산재를 감싸고 있는 산자락의 낙엽송이 풀빛이었다가 연둣빛이었다가 고운 금빛이었다가 싯누런 땅빛이 되어 바람에 날릴 무렵을 나는 골바람 부는 계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골바람은 틀림없이 팔석정 너럭바위에서 휘돌아 오는 거라고 우겨보기도 한다.


오늘도 골바람이 들이닥친다. 낮은 온도로 맞춰놓고 보일러를 켠다. 연통이 연신 그르렁거리며 기름을 태운 연기를 내뱉느라 바쁘다.

기름값이 내리길 여름 내 바랐지만 러시아 우크라이나도 모자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도 전쟁이다.

욕망 성냄 어리석음과 손잡고 사랑과 연민 지혜와는 담을 쌓은 자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동안 힘없는 이들은 춥고 배고프고 병들어 쓰러지고 죽어가고 있다.

골바람이 동장군을 호위하고 겨울을 데려오듯 전쟁은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을 몰고 오는 법이다.


휴, 우우웅--  퍼더덕 휘이익-- 골바람이 불어대니 생각도 많아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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