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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Dec 31. 2023

아름다운 사람이 부럽다 - 그믐날의 바람

산골 일기

한해 끝자락, 그믐날의 바람


한 해가 저물 즈음, 새해로 바뀔 즈음, 설날이 가까워질 즈음, 빚진 듯이 빚 갚는 듯이 곱고 예쁜 카드를 잔뜩 사서 안부가 뜸했을 뿐이지 향한 마음은 뜸하지 않았던 듯, 한 글자 한 낱말마다 먹물 찍어 쓰듯 마음을 전하던 때가 있었다.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수십 장의 카드를 가방에 넣고 우체국으로 가서 먼저 우표를 산 뒤 풀칠하고 행여 떨어질세라 꼭꼭 눌러 붙이고는 다시 한번 주소와 이름을 확인하고 부치곤 했던..., 돌아보니 낭만이었다.


순수감성 따뜻한 마음이 솟아나던 그때처럼 지금도 펜 끝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덩달아 요즘 문화 속에 풍덩 빠져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문득문득 낭만 있던 그때를 떠올리면서 서랍에서 세월의 더께와 함께 박제되고 있는 우표를 꺼내본다.


손글씨로 한해의 고마움과 새해 바람을 눌러 담은 카드를 써서 보내고 싶어도 눙쳐둔지 너무 오래인 만큼 '손글씨'는 아주 특별한 것이 되었다.




몽글몽글 감성 솟아나던 그때 나의 손글씨들은 모두 재가 되었거나 상자 속 또는 서랍 속에서 좀먹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누군가들로부터 받은 손글씨들이 상자 속에서 누렇게 바래고 있음을, 새해가 되기 전 날 새 달력을 보다가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어 눙쳐두었던 봉투들을 꺼내 들춰 보기에 이르렀다.

잊고 지낸 인연들 잊고 있던 세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열심히도 적바림 했던 지식 공책들, 어디선가 받은 초청장과 영수증들, 지금은 얼굴이나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때는 소중한 만남의 인연들이 보내준 손글씨 편지들도 한 무더기 나왔다.

낯선 먼 나라에서도 우연인 듯 필연으로 만나 기름 짜내듯 꾸욱 짜내어 주고받았던 정들이 바위에 새긴 양각처럼 선명하게 튀어나왔다.


우리나라 스님과 수행자들, 꼿꼿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정진하던 대만의 지림 스님, 베트남 2세에게 회향하려던 마음 돌려 용돈 쪼개 주신 스님, 나를 위해 스스로 모금 활동을 한 님, 돈이 떨어져 빌렸는데 얼른 갚지 못해 서로가 난처했던 순간들이 검누렇게 바랜 종이에서 꿈틀거리며 그때의 그 순간으로 데려갔다.

행복하다 여기면서 이만큼 와있는 지금, 저만큼 멀어진 그때를 돌아보니 참 따스해진다.




따지고 보면 숫자 하나 바뀔 뿐이고 여전히 어제처럼 지낼 거면서, 세상이 바뀌는 듯 우주가 바뀌는 듯 이런저런 의미를 끌어오기 바쁜 한 해의 끝자락이다.

해는 날마다 떠올랐다 저물다를 되풀이하기에 순간순간 마음과 말과 행동을 곰곰 살피기를 잘한다면야 이름뿐일 이런저런 날들이고, 행복하던 안 행복하던 주인공은 오롯이 '나'이리라.


달라진 것은 땅별이 빠르게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고, 뜨거운 덕에 머지않아 눈이나 눈사람 만나는 일은 '전설의 고향'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찰나의 걱정과 덧붙여 우리나라 아이들은 금수강산이 아니라 아열대 기후를 물려받고 조상들의 욕망까지 대물림하고는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돌연변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공상을 펼치다가 소스라치면서 새해엔 기후악당국에서 벗어나도록 더 적극 이산화탄소 온실가스를 줄이는 일에 앞장서야겠다 다짐을 하기도 한다.


몸은 세월 따라 잘 흘러(늙고 바뀌어) 간다. 그러나 마음은 미처 못 쫓아가고 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특히 '착각하는 마음'은 절대로 세월 따라가지 않는다.

흔히들 말한다. '마음은 안 늙고 그대로'라고.

아니다. 마음 또한 그대로는 아니나 착각을 할 뿐이다.

청춘 나이에는 젊은 사람들은 그저 멋있을 뿐이었고 사오십대 중년의 사람들은 엄청 지혜로워 보였고 아득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나이 되고 보니 젊은 이들은 그저 어리거나 철없거나 풋풋해 보일 뿐이고, 또래나 나보다 나이 많아도 덕이 없으면

그저 그런 아저씨 아줌마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생각이 깊고 덕행이 있는 이들이 멋져 보인다.

마음은 그저 조금 더디 갈 뿐이지 세월 따라 안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처음 만났어도 멋져 보이는 사람이 있다.

작은 비닐조각 담배꽁초조차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이다.

설거지나 빨래나 청소를 세제 마구마구 쓰지 않고 기름기 있는 그릇과 없는 그릇을 가려가며 물을 오염시키지 않는 천연세제로 꼼꼼하게 닦는 이다.

바깥에서 커피나 음료 물을 마실 때도 한 번 쓰고 버릴 컵들 대신 물병이나 물 잔을 쓰는 이다.

자신이 하는 일 내세우지 않고 그저 할 뿐으로 여기며 자연스레 삶으로

이어가는 그런 사람이다.

고향이나 학교 취향이나 성향 또는 생각이 다르다고 편 가르지 않는 이다.

잘 났다 못났다 따지지 않는 인격과 인품이 좋은 이다.

부자건 가난하건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살아있는 생명 함부로 괴롭히지 않고 죽이지 않는 이다.

주지 않는 것 뺏거나 훔치지 않는 이다.

이성이던 동성이던 희롱이나 추행이나 폭행하지 않는 이다.

거짓말은 물론 둘러대는 말도 않고 거친 말도 않고 쓸데없는 말도 않는 이다.

힘들 때마다 술이나 약물에 의지하지 않는 이다.

한마디 말일지라도 가슴 깊이 파고들어 아픔이 녹아내리는 힘을 가진 이다.

작은 손길일지라도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힘듦을 잘 어루만져 주는 이다.

길지도 많지도 않은  짧은 한 마디에 다 들어있는 울림이 있는 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비를 맞는 사람을 보고 우산을 건네거나 가지고 있던 우산을 버리고 함께 비를 맞아주는 이다.

이렇게 멋진 사람들은 늘 가까이 만나지 않아도 보면 반갑고 참 좋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사람다울 때이다. 사람다운 일을 할 때다.


사람의 값나가는 물건보다 가치로운 말과 행동을 볼 줄 아는 일이다.

억울하고 힘든 일을 겪는 이들의 손을 잡아줄 줄 아는 일이다.

슬프고 아픈 이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하는 일이다.

아무 말 없어도 꽉 잡은 손에 진심과 정성을 다해 안아 주고 토닥토닥 쓸어주는 일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참 부럽다.

새해에는 사랑이 한 뼘 더, 연민이 한 뼘 더, 편함이 한 뼘 더, 지혜가 한 뼘 더 자라면 좋겠다.

짧은 글귀일지라도 심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한 해의 끝자락 그믐으로 가는 날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여 온둘레가 아름답다. 하얀 아름다움이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새해엔 사랑과 연민, 지혜와 너그러움이 어둠 속 눈처럼 반짝반짝 빛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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