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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Feb 02. 2024

설을 그리다

별별 생각

설을 그리다


- 새롭고 낯선 때에 익숙하지 않아서 ‘설’이라 한다.

- 한 해를 새로 세운다는 뜻 ‘서다’가 ‘설’이 되었다.

- 17세기 문헌에 따르면 ‘설’이 ‘나이’ ‘해’를 뜻하는 말로 쓰였고,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날이라는 뜻으로 ‘설’이 되었다.

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낯) 설어서 설날인 것만 같은 음력 1월 1일 '설'은, 삼국시대 때부터 쇠어온 오래된 우리 '고유 명절'이다.


그럼에도 '설'은 한동안 설움 받아야 했고, 지금까지도 제 이름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설운 명절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양력을 쓰는 일본이)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부르게 했던  '구정(舊正)'이라고 하니 말이다.

우리 명절 설이 따름 따름 더 설어지고 있는 건, 해방이 되어서도 아무 생각 없이 구정이라고 하다가 박정희 정권 때는 아예 없애려고 공휴일에서도 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국민들이 '설을 큰 명절로' 쇠니까 전두환 정권 때는 '민속의 날'이라고도 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정이라고 하면서도 '우리 고유 명절'이라는 듯 꿋꿋하게 쇠니까 몇 해 뒤 '민족 명절 설'로 다시 이름 지어 붙이고 공식 공휴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구정이 아니라 민족 명절 설'.

명절(名節)은 절기마다 의미를 두어 기리고 기념하던 것으로, '설' 말고도 정월 보름, 입춘, 한식, 단오, 유두, 칠석, 한가위, 중양절, 동지가 있지만 우리 삶에서 거의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게 설 그리고 음력 8월 보름의 한가위(추석) 일 것이다.


우리네 조상들은 음력 1월 1일 새해를, 몸은 물론 마음도 재계(齋戒)한 뒤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차례 지낸 뒤에는 고마움과 덕담을 주고받으며 세배를 하는 것으로 새해맞이 의식을 하였다. 그래도 아쉬우면 성묘를 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조상님은 물론 가족친지와도 설날을 잘 보내야 한 해가 잘 풀린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 믿음은 속설이 되어 몸과 마음을 (목욕) 재계하고 새 옷을 입고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조상님께 올린 뒤 나누어 먹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나이 한 살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 집도 음력  1월 1일에 설을 쇠어왔다. 나는 설도 되기 전 뭔지 모를 설렘이 알짱대 한껏 들떠있었다.

그리고 구정이라는 말을 쓴 기억이 없다. 특별하게 민족정신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대대로 이어온 관습이자 관례의 DNA가 작동해 의심 없이 따랐던 것뿐이다.


내친김에 기억 속 (어릴 때) 설날을 앞둔 풍경을 더듬어보자.

낮에는 햇빛으로 밝았지만 밤에는 호롱불을 켜지 않으면 더듬어도 모르겠는 컴컴한 부엌에 몇 며칠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한가득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여느 때는 작두에 잘린 강냉이대와 콩깍지에 쌀뜨물과 (세제 없이) 설거지한 물을 넣고 쇠여물을 끓이던 커다란 가마솥이, 맑은 물로 몇 번 씻기고 헹구어진 뒤 맷돌로 타갠 강냉이와 엿질금 우려낸 물이 가득 담겼다.


장작과 잔가지로 조절해 가며 버강지(아궁이)에 불을 때는 한편 길다란 나무 주걱으로 가마솥 안을 저으면서 엿질금 물을 졸이다 보면 멀겋던 물은 어느새 조청이 되었고 이윽고 엿으로 고아졌다.

엿이 고아지고 엿누룽지를 긁어낸 가마솥이 다시 말끔히 씻기는 동안 한쪽에서는 잔뜩 불린 콩이 맷돌에 갈리고 다시 고운 천으로 만든 자루에 담겨 함지박 삼발에 얹어지면 뽀얀 콩물이 자루 밖으로 미끄럼 타고 흘러내렸다.

달큼하고 비릿한 뽀얀 콩물을 이내 가마솥으로 쏟아부었다.

장작불에 콩물을 끓이다가 오래전 소금 단지에서 빠져나온 간수를 넣으면 몽글몽글 순두부가 되었고, 다시 베보자기를 깐 네모통에 익은 콩물을 담고 함지박을 눌러놓으면 네모난 두부가 되었다.




가마솥 옆의 밥솥 국솥도 덩달아 뭔가가 끓여지고 달여지느라 바빴고,

뒤란에 늘 누워있는 평평한 암반 위에는 시루에서 막 쪄내 김이 설설 나는 고두밥이 올려졌다.

아버지가 모처럼 힘을 쓰는 순간이다. 밥알이 뭉개지도록 떡메를 내리치면 할머니는 밥알이 골고루 뭉개지도록 이리저리 뒤집으셨고, 다 뭉개진 떡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빚어놓은 팥소를 넣고 덮은 뒤 반달 모양으로 찍어냈다. 귀때기 떡이라 불렀던 반달 모양의 계피떡이 들기름 단장을 하고 함지박에 담겼다.

떡에 곁들일 감주(식혜)도 만들었다.

울궈낸 엿질금에 밥을 삭혀 끓이는데, 손님들에게 낼 건 맑게 하고 우리 것은 가라앉히고 남은 걸 끓여 거무스름했다. 하지만 맛은 더 구수했다. (이 맛이 그리워 가끔 일부러 해 먹는다) 얇은 살얼음이 덮인 감주 단지에서 할머니 몰래 떠먹는 맛은 참 달큼하니 좋았다.


설날을 앞둔 때만 만들었던 음식들이다. 가마솥은 그 뒤에도 설빔 입기 전 묵은 때 벗길 목욕물이 데워지느라 쉴 새가 없었다.


집에서 한참 뚝 떨어진 샘으로 엿 또는 두부와 술에 들어갈 물을 길으러 물동이를 이고 눈 얼음 오솔길을 수십 번은 오갔을, 몇 단의 나뭇단을 먹어치우는(?)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매운 연기 내뿜는 덜 마른 솔가지까지 때느라 눈물깨나 흘리셨을 어머니, 술을 담그고 엿을 고아내고 두부를 만들고 만두를 빚는 동안 잔소리깨나 하셨을 할머니의 고단한 (엄청 힘드셨을) 몇 며칠이 내게는 참 달큰 푸근 따뜻하게 설레는 날들이었다.




안방 아랫목이 검누렇게 눌을 정도로 몇 며칠 아궁이에 불을 때던 그날들, 나무가 타면서 내뱉는 연기와 가마솥에서 올라오는 희뿌옇고 뜨거운 김이 한데 엉겨 시커먼 그을음 싸안고 부엌 구석구석으로 사라지곤 하던 그때, 할머니와 엄마의 수고로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 먹지 못하던 먹을거리, (설 대목장에서 사다 놓은 새 옷이 반다지 안에 들어있었지만) 설날 아침이면 입을 수 있는 설빔 생각에 빨리 설날이 되면 좋겠다고 괜히 저 혼자 설렌 건 어쩌면 먼 데 사는 친척들도 찾아온다는 사실도 한몫했던 듯하다. (나는 앞을 보면 앞산 뒤를 보면 뒷산옆을 보면 옆산이 있는 곳에서 살았기에 사람 구경하기 어려웠다.)

부엌에서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김마냥 몇 번이나 몽실몽실 일어나던 설렘으로 드디어 그믐 밤을 맞는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에 안 자려고 버티다 보면 자시(子時: 밤 11시), 만둣국으로 제사를 지내는 동안까지는 어찌저찌 견뎠지만 어느새 잠이 들었고 깨 보면 설날 아침이었다. (설날 차례는 밥으로 간단하게 지냈다.)


진짜 양반은 제사 음식은 남정네가 만들었다는데 우리 집은 가짜 양반인지 음식은 물론 재를 묻힌 지푸라기 수세미로 제기(祭器)를 닦는 일도 할머니와 엄마의 몫이었다. 남정네인 아버지는 기껏해야 제사상에 올려질 생률(밤)을 친다(밤 살을 깎아내 이쁘게 만드는 일) 거나, 다 만든 음식을 조율시이(棗栗枾梨) 홍동백서(紅東白西) 따져가며 병풍 앞 상 위에 올려놓고 도포 의관 차려입고 향 피우고 절하는 것뿐이었다.

힘들게 며칠 밤낮을 고생하던 할머니와 엄마는 막상 차례(제사) 상이 차려지면 방 밖 봉당에 있어야 했고 차례(제사)가 끝날 무렵이 되어 부르면 그제서야 들어가 네 번 절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철딱서니 없던 나는 평소와 다른 그 모습 그 풍경도 마냥 좋았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골, 마땅한 주전부리가 없던 그때, 설이나 돼야 쌀과 강냉이 튀밥을 조청에 궁굴려 빚어 놓은 과즐을 먹을 수 있었고, 조청을 더 고아 반반하게 빚어 얼려놓은 엿을 물고 다닐 수 있었다.


오늘날은 날마다가 설이고 추석 같은 명절 때나 먹던 음식이 쎄고 쎘다. 두부나 엿을 고아낼 일도 없고, 그믐에 올릴 만두를 빚는 일도 없다. 계피떡이니 식혜도 지천으로 널려있어 돈만 주면 언제든 먹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몇 백리 길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초고속 스마트한 세상이다.

달큰 푸근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때가 흑백사진처럼 아련히 일어난다.

물 긷고 맷돌 갈고 가마솥에 불을 때 엿을 고아내던 이야기는 머지않아 호랑이가 곰방대 물고 담배 폈다던 이야기만큼이나 낯설고 생뚱맞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립다.

지루할 만큼 느렸던 그때가. 시커먼 그을음만큼이나 곤궁기가 흐르던 그때가. 설이 얼마 안 남은 까닭이다.




구정이 아닌,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설 명절의 의미를 곱씹어 가며 기억 속 그때 그 집 부엌 뒤란 안방으로 쏘다니고 있다.

쏘다니면서 '달큰 푸근한 추억을 쌓는 날이기를! 게임이나 TV와 함께 하는 대신 둘러앉아 윷놀이 한 판 하면서 모두가 웃는 날이기를! 말 한마디라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설 명절이길!' 바라는 마음도 한껏 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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