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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실려가는 날
산골 풍경
by
버폐
Aug 25. 2024
양배추 실려가는 날
젊은 일꾼 없어 여든 노인 품을 사는
산골 골짜기 양배추밭엔 다른 나라서 온
젊은이들 봉고차로 실려와
진흙 밭서 진종일
식칼 들고 긴 고랑 로봇처럼 구부렸다 폈다
등허리에서 소금꽃 피어나 번질 때면
골라골라 자루에 다섯
개씩 가두어 묶느라
구부렸다 들었다 놨다 비지땀 번져간다
봄날, 몇 천 평 빼곡히 한 뼘 모종 심길 때는
이틀 낮 고랑고랑 나래비로 2인 1조
걸음마다
푹- 푹- 이랑 덮은 검은 비닐 위를 이식기로
사정없이
내리찍어 입 벌리듯 흙 틈 생기면
툭- 떨어뜨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가
이랑 고랑 안 보이게
둥글 동글 자랐다 싶을 때
식칼 들고 나타나 매의 눈으로 훑으며 두리번
듬성 건너뛰다가도 마츰하다 싶으면 엎드려
밑둥치
깊숙이 스윽- 식칼에 힘주어 썩-둑!
잘렸어도 마츰치않으면 밑둥치 칼집 안긴 채
뿌리에 껍데기만 남은 고랑으로 내동댕이 친다
여름, 물기 머금은 바람 앞세운
한밤중부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새벽까지
이맛불 비춰가며 슥- 썩둑! 스윽- 썩둑!
아침이 돼도 너른 온 밭에서 스윽- 썩-둑!
알레그로 모데라토 바람에 실어 흩뿌린다
평평한 곳 찾아 점심하는 베트남 일꾼
작업복 비지땀 소금꽃 허옇게 너풀거릴 때
고갱이
밑동 잘린 채 끌어모아 토해보는
숨 냄새만 꾸리꾸리 달큰 퀴퀴하니 떠돌고
자루에 갇힌 양배추들 더미로 쌓여가고
바퀴에 진흙 칠갑한 세렉스가 출동하여
부지런히 자루 더미 덜어내 다릿목에서
기다리는 큰 트럭으로 옮겨 쟁여 쌓으면
부르르릉
무거운 신음 털어내며 모퉁이로
사라지는 산골 양배추들 멀미는 따놓은 당상
멀리 떠나건만 배웅할 힘도 없이 병들어
무른 것들 마츰하지 않아 남겨진 것들
이틀 안 죄다
사약받을 운명이렷다
마츰하지 않아 칼집 안은 것들도.
* 알레그로는 '빠르게', 모데라토는 '보통 빠르기'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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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친 그리움이 아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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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생명, 환경, 사라져가는 것들을 가까이 하면서 마음 키와 마음 밭이 한 뼘 더 크고 넓어지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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