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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Jun 26. 2023

세포들이 기억한 아픔이 깨어나다

병상 일기 5


마음 곳간(장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은 물론 세포에도 저장된, 아주 오래전 겪은 증상들이 깨어나는 날들이다.


범이 곰방대 물고 담배 피우고 여우가 재주넘던 아주 옛날은 아닐지나, 총과 법을 주무르던 자들이 (지금 보다 더) 활개를 치던 무법천지이던 옛날,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던 자들이 꾀를 낸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을 빛깔로 나누는 거였다.

사람들이 무슨 파란 스머프도 아닌데 빨간빛에 물든 이들이 있다며, '민주'라는 말만 해도 '빨간 이'로 여기며 날마다 사냥을 해댔다.

그물은 물론 덫에 올가미까지 온 나라 곳곳에 펼쳐놓고 어느 한 곳에 걸리기만 하면 빨갛지 않아도 빨간 이가 돼야 했다. 그 '빨간 이' 사냥 덕분(?)에, 군대 'ㄱ'에도 가지 못한 내가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얼차려(기합)에, 점호를 시작으로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원산폭격 대가리 박아!", "깍지 끼고 푸시업!"  따위의 낱말들을 알게 됐다.

제대로 못했을 때는 다짜고짜 막무가내로 군화발길질과 함께 정강이를 찍혀야 했다.

조직표를 만들어 놓고 '빨간 '로 만들기 위해 심심하면(?) 곤봉으로 온몸 구석구석을 두들겨 패다가, '비녀 꽂기' '통닭구이'라는 정보과 대공과 형사 그들만의 세상에서 쓰는 말을 몸으로 체험하게 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통증들이 있었는데, 오래전 아득하게 사라진 줄 알았고 까-맣게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곰곰 관찰하다 보니 하루하루 너무도 뚜렷하게 되살아 나오고 있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때의 것'인 줄. 호전 반응이나 명현반응인 줄 알았다.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어쩌지 못할 만큼 시큰 뻐근 터질 듯, 앉지도 서지도 무릎을 꿇지도 못하게 터져나가는 듯한 느낌은 나의 온 참을성을 시험하곤 한다.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사라지는 게 아니라 틈틈이 더 뚜렷이 더 크게 나타나는 '그것'은 분명 '그때의 것'이었다. 담당 교수님에게 묻는다.


"오래전 겪은 통증이 되살아날 수도 있는가요?"


"그럴 수 있죠. 세포들이 다 기억하니까요."




코로나로 면회를 할 수 없기에 문만 빼꼼 열고 필요한 걸 들여보내는 상황에 가방을 전해 받는다. 곧 정월 보름이라고 정성스레 지은 오곡밥에 나물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날짜를 헤아려 보니 입원한 지도 벌써 보름이다.


해가 떠오르기 바로 전이 가장 어둡듯, 생생하게 살아나는 통증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찬란히 되살아나오는 호전 반응과 현상이라 믿으며, 세포에 기억된 통증이 극에 이르는 일 또한 마지막 날이길 바라는 마음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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