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생각하고 있는 소설이 하나 있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몰락한 양반 출신과 세도 가문 출신의 주인공들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야기다. 흙수저 주인공을 영호라고 하고 금수저 출신을 철수라고 하자. 영호는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나 살림이 어려워 전라도의 외딴섬 고금도까지 흘러 들어간다. 거기서도 책을 놓지 않고 매진하더니 일본으로 건너가 직장을 구한다. 아사히 신문사의 식자공이다. 기사를 읽고 활자를 찾는 일을 반복하면서 식견은 더 넓어지고 사람들 앞에서 일본 경제의 앞날을 논할 정도가 되었다. 여비가 마련되자 그는 지체 없이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마르세이유다.
프랑스에서 여러 인사들과 연이 닿는 과정은 구상하기 힘들다. 어려운 부분은 건너뛰고 그냥 파리의 한 박물관에 일자리를 구했다고 하자.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두고 있어 동양에 관심이 높았다. 그는 한자로 된 서적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일을 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작품을 발표한다. 춘향전이다. <향기로운 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은 복수극이면서도 죽는 사람이 없는 것이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다. 내친김에 <마른 나무에 꽃이 피다>라는 제목으로 심청전까지 번역한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그는 조선이 하루 바삐 개화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다만 자주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온건 개화파, 왕당파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마른 나무에 꽃이 피다> 서문에 적었고 카페 뒤 마고에 모인 인사들 앞에서 밝히기도 했다. 청중 중에 프랑스의 왕자 오를레앙 공도 있어 즉석에서 성금이 모였다. 3년여의 유학 생활을 마친 그는 귀국길에 오른다. 배를 갈아타기 위해 일본에 들리게 되고 여기서 철수를 만난다.
철수는 안동 김씨 가문으로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할 만큼 명민했다. 수신사로 일본을 드나들면서 개화에 일찍 눈을 떴고 봉건사상에 젖어 있는 조정 신료들을 답답해했다. 그나마 진행되던 개혁이 군란으로 미뤄지고 차관을 빌려오는 계획마저 틀어지자 조급함을 느꼈다. 충분한 준비 없이 정변을 일으켰고 개혁 정강을 발표한다. 여기서 평등을 말하고 입헌 군주제를 내세우니 시대를 앞서간 것이 분명하다. 다만 토지 개혁에 대한 내용이 없어 민초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국제 정세가 급격히 변하면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철수와 영호의 관계는 영화 <리플리>에서 주드 로와 맷 데이먼의 사이처럼 하는 게 좋겠다. 한 명은 망명객이긴 하나 뒷배가 든든하고 다른 한 명은 자수성가하여 이 자리까지 올랐다. 어느 연회장에서 만난 그들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개화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새로운 세상을 함께 꿈꾼다. 둘 사이에 여인을 등장시켜 긴장감을 올리면 더 좋다. 일본에서 더 이상 뜻을 펼치기 힘들다고 생각한 그들은 상해로 향한다. 그리고 여독을 풀고 있는 철수의 방에 영호가 들어서고 권총이 불을 뿜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영호는 나름 설득했다. 다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편을 기다리던 영호에게 조선 왕실의 비밀 요원이 찾아왔다. 조선은 그동안 철수를 암살하기 위해 여러 번 자객을 보냈다. 일본 경찰의 경호로 모두 실패하고 외교 문제로 비화하자 그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영호를 지목한 것이다. 의도적인 만남이긴 했으나 영호는 철수의 해안과 결단력에 감탄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은 같지만 왕조의 단절마저 각오하는 마음을 읽고 결심을 굳혔다.
서울이 초고를 탈고해서 출판사에 가져가자 편집자가 창작 작품인지를 물었다. A.I. 를 한번 돌려보더니 이미 있는 사실을 소설처럼 쓰면 곤란하다고 했다. 이미 있다니? 그에 따르면 영호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란다. 철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란다. 어디서 약을 팔러 왔냐는 눈으로 바라보기에 서울은 서둘러 출판사를 나왔다. 자기는 상상만 했던 것을 실제로 해낸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그 옛날에 하다니. 우리 조상들이 참 다이내믹하다. 다들 열심히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