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에피소드 ③
<…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지도자와 그 집단에 대해 야박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그들이 힘들어 울어야 국민이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건… 정책이나 전문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사회지도층이 국민보다 힘들지 않고 편하게 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내 말을 다 들은 뒤 “이광재 씨에게 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경우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끊는 게 보통이라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뭐 그렇더라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한 게 아니었다. 취재를 접으려고 했다.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고, 그가 만나줄 리도 없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위에 ‘이 정도까지 해봤는데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라고 말하고, 세게 욕먹은 뒤 끝내려고 했다. ‘당연히 전화는 안 올 테고 2, 3일 지난 뒤 위에 얘기하고 접어야지.’ 내 머릿속은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진구 기자인가요?”
“네 그런데요?”
“이광재입니다. 혹시 언제 시간이 되시나요.”
“네….”
어이없게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서 설명하겠다고. 하… 우린 만나서는 안 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취재였던 만큼 그를 만난다는 사실을 위에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위에서는 뭔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고, 여기서 취재를 접으려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뭔가 나오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의 해명 외에 아무것도 없는 취재의 끝은 뻔한 것이다. 나는 그의 해명을 위에 전달하는 것 외에는 사실상 다른 길이 없고, 차이는 지금 욕먹고 끝낼 일을 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겪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 시간이 늘어지는 만큼 나는 더 힘들겠지. 그때 왜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수백 발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인디언 아파치 전사가 머리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두 차례 연기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는데, 청와대에 갑작스러운 상황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 3월 22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 한 커피집에서 마침내 그를 만났다.
“1985년 (대학에서) 제적당하고 신체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선배들이 (학생) 운동을 더 해야 한다고 해 두 차례 입영 연기를 했죠. 그때 인천 부평의 마찌꼬방(町工場·건설업계에 남아 있는 일본식 용어로 소규모 공장을 뜻한다)에 위장 취업을 했는데 대기업 위장취업을 하기 전에 기계 조작법, 노동자의 습성 등을 배우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공장이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고, 변두리 가정집 지하에 기계 몇 대 놓고 하는 곳이죠. 그때 기계를 다루다가 사고를 당해 그렇게 됐어요.”
이후 두 차례 더 만났지만, 진전은 없었다. 검지 한 마디가 잘릴 정도면 당연히 병원에 갔을 텐데 그는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라고 했다. 출혈이 엄청났을 그런 큰 상처를 병원에도 안 가고 어떻게 치료했는지는 설명하지도 않았다. 빨간약과 붕대로 될 일이 아닌데…. 그는 사고를 목격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 정도 사고라면 분명 엄청난 비명을 질렀을 테고, 그의 말마따나 공장도 아닌 가정집 지하 같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도 없었을 텐데 이해가 안 갔다. ④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