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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일기(13): 요즘 젊은 법조인들은..

by 장파덕

마찬가지로 법무관 시절의 이야기이다. 어느 중년 부사관이 젊은 여성 주무관을 상대로 성희롱을 한 혐의로 징계를 받았는데, 피징계자가 징계처분에 불복하여 징계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나는 징계권자의 대리인으로서 징계처분이 적법하였다고 주장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피징계자에 대한 징계사유가 인정되고, 징계절차가 적법하였고, 징계양정이 재량권의 범위 내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원고인 피징계자는 애초에 그런 사실관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즉, 자신은 그러한 성희롱적 발언을 한 사실 자체가 없는데 피해자가 자신을 모함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성희롱이나 성추행 사건은 대체로 당사자들의 진술증거 이외의 증거가 있기 어렵다. 그나마 목격자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대체로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의 진술의 구체성, 일관성, 신빙성이 얼마나 인정될 수 있는지, 피해자가 혐의자를 무고할 만한 동기는 없는지, 피해자와 혐의자의 평소 관계는 어떠한지가 징계혐의사실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주장하고 혐의자가 가해사실을 완강히 부정하는 경우에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다만, 피해자의 진술과 혐의자의 반박진술을 비교하였을 때 명확히 모순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혐의자 역시 최소한의 사실관계는 인정한다. 피해자가 그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역시 혐의자가 반박하는 과정에서 왜 그런 사실이 있을 수 없는지에 대해 변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의문점이나 모순점이 생기면, 결국에는 피해자나 혐의자 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가령, 피해자가 차량 내에서 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혐의자가 '커피를 계속 들고 있어서 포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하고, 다시 피해자가 '두 시간 내내 커피를 들고 있었다는 거냐, 커피를 차량 컵홀더에 두고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추행을 당한 시점의 전후 사정을 구체적으로 진술한다면, 진술의 신빙성이 올라간다.


아무튼, 결국 진술 대 진술의 싸움이기 때문에 결국 누구의 진술이 더 믿을만한 것인지, 누구의 진술이 더 구체적이고, 일관적이고, 모순이 없는지를 두고 징계처분의 적법성을 따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대다수의 원고(피징계자)들은 징계처분취소소송을 제기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청을 한다. 피해자를 직접 신문해 보면서, 실제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따져 보겠다는 것이다. 피해자를 추궁하면서 모순점이 발견되면 그 모순점을 근거로 징계의 대상이 되는 사실이 아예 없었다고 주장하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징계권자의 대리인인 나로써는,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을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다.


아무래도 징계처분취소소송이 제기된 시점은 피해 당시로부터 최소 1~2년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아무리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기억이 희석될 수밖에 없다. 최초 진술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진술하면 원고 측에서 이를 물고 늘어지며 징계의 부당성을 주장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징계처분이 취소될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가 없다. 한편으로, 피해자 당사자가 법정에서 원고 측의 공격적인 질문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굉장히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일 것이다. 군은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굳이 피해자를 증인신문이라는 정신적 고통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기도 하다. 보는 사람이 짠하다.


그래서 의견서를 통해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의 우려가 있다, 피해자가 정신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며 증인신청을 채택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재판부에서 나의 주장을 받아들여주었다. 그런데 다음 변론기일에서 재판부가 변경되었고, 원고 측에서 재차 증인신청을 받아들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재판장의 발언이 가관이었다. '요즘 젊은 법조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성폭력 관련 형사재판에서도 피해자를 증인으로 불러 신문하는데, 징계 관련 행정재판에서도 당연히 피해자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 2차 가해 우려는 증인 불채택의 이유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사실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강간이나 강제추행 관련 형사재판에서도 피해자를 증인으로 불러서 구체적인 피해상황을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 피해의 정도가 경하다고 볼 수 있는 행정재판에서 피해자를 증인으로 부를 수 없다고 보는 건, 원고(피징계자)의 방어권 보장의 측면에서 부당하다. 단순히 2차 가해 우려가 있고 증인이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증인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사실 궁색한 논리이다. 원고 역시 본인이 억울하게 징계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고, 피해자의 진술이 거의 유일한 증거라면, 피해자를 불러서 그 진술의 신빙성을 따지게 해 주는 게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요즘 젊은 법조인'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쾌했다. 요즘 젊은 법조인들의 성인지감수성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붙이지 않고도 재판장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요즘 젊은 법조인이라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이유로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청을 반대하는 것인가? 그런데 내가 기성 법조인이더라도 그런 주장을 했을 것이다. 왜냐? 변호인은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여나 피해자가 증인으로 불려나와서 다소 비일관적인 진술을 할 리스크가 있고, 무엇보다도 군으로서는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관점에서 증인신문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나도 2차 가해 우려와 정신적 충격을 받을 우려를 이유로 증인신청을 반대하는 게 논리적으로 다소 궁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판사가 아니라, 징계권자인 부대장의 대리인이었고, 징계권자에게 최선의 선택은 증인신청이 채택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다소 궁색한 이유로나마 증인신청에 반대하였다. 사실 법률대리인은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서 가끔은 헛소리라도 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법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걸 알아도, 가끔은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해야만 한다. 그게 판사, 검사와 다른 변호사의 숙명이다.


아마 그 재판장님도 판사직에서 물러나고 변호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면, 더 이상 중립적인 위치에서 원리원칙대로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의뢰인을 위해서라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도 일단 '찔러봐야' 할 일이 있을 테다. 혹시나 받아들여지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판사한테 '한 소리' 들으면 그만인 일이니까. 내가 만약 원고(피징계자)의 변호인이였다면 무슨 헛소리를 해서라도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그저 난 피고(징계권자)의 대리인이었기에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변호사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고, 그런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동료 법조인에 대해서 '요즘 젊은 법조인' 운운하며 훈계의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판사와 변호인의 차이가 비록 있으나 어쨌거나 동료 법조인 아닌가. 내가 법리를 몰라서 그런 주장을 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고 대리인의 입장에서 (다소 무리한) 법적인 주장을 하였을 뿐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판사가 내 상관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훈계하여서는 안 된다. 대단히 무례한 일이다. 굳이 선배 법조인의 입장에서 훈계를 하고 싶었다면 법정 외에서 사건이 종결된 다음에 개인적으로 말을 했어야 했다. 마음같아서는 '요즘 늙은 법조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시나 보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 속으로 삭혀야 했다.


판사의 그릇된 권위의식과 변호인의 역할에 대한 몰이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부디 그 판사님도 얼른 퇴직하시고 변호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시길 바란다. 변호사가 되어서도 그렇게 고고한 학처럼 '객관 의무'를 견지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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