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되었다. 2학기에는 자유학기제로 시럼이 없다는 사실에 딸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적어졌다.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것 같다. 가끔 남동생에게 별것도 아닌 일에 성질을 내는 것만 빼면 사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딸이 야구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요즘 지인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 보면 심심찮게 경기장에서 찍은 사진이나 응원하는 유니폼을 찍은 사진이 종종 올라오곤 했는데 우리 집에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뜻밖이었다. 늘 친구들과 서울을 간다느니 약속이 있다느니 하는 딸이 나와 같이 야구를 보러 가고 싶다고 하니, 그 말을 속뜻에는 '엄마랑 같이'가 있으니 나는 살짝 기분이 좋았다.
야구 경기를 보러 가려면 우리 집에서 최소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이상 거리의 타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니 친구들과 가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엄마의 기동력과 자금력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인심 쓰듯 가주겠다고 하고 티켓을 얘매하라고 한다. 티켓 오픈 시간 20분 전부터 딸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초시계로 시간은 주시하며 티켓팅을 시도했으나 자리가 없다.
'그게 야구장 티켓을 사는 일이 돈만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멤버십회원에게는 하루 전에 티켓예매 사이트가 열린다고 하니 그 사람들이 다 사고 남은 자리를 두고 멤버십이 아닌 사람들이 경쟁을 하는 것이었다. 딸은 취소 자리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며 수시로 핸드폰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딸은 취소한 응원단석에서도 여섯 번째 줄의 2 연석 자리를 잡았다. 일요일 경기라서 가능했다는 딸의 이야기.
처음에는 경험 삼아 야구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이 한번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매가 어렵다는 소리에 못 가겠구나 하고 포기했다. 그러다가 딸이 시도 때도 없이 취소한 자리를 찾기 위해 핸드폰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딸은 결국 티켓 예매에 성공했고, 나 모르는 사이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새로고침을 무한 반복했을 딸의 모습을 생각하니 이번 한 번만 같이 가주마 하고 다짐했다.
남편은 아이돌 좋아하는 것보다 얼마나 건전하냐며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다. 일요일 6시 경기를 보다가 8시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으로 와도 밤 10시가 넘지만 딸은 마냥 신났다.
딸의 생애 처음인 야구장은, 나에게도 생애 처음이었다. 연애할 때 이런데도 안 데려가준 남편이 원망스럽게 야구장에는 가족들은 물론 연인들도 많았다. 빈자리사 설마 다 찰까 싶었지만 경기시작 시간이 다가오니 경기장은 꽉 찼다. 나는 언제 또 경기장에 올지 모르니 딸이 원하는 간식도 사주고 최대한 딸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응원하는 팀의 공격시간이면 응원석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응원가를 부르고 율동을 한다. 야구장이 처음인 딸은 여러 번 와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어라? 학교공부 안 하고 이것만 공부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설프게 동작을 따라 하며 응원단지 외치는 구호를 따라 외친다. 처음에는 수줍고 하다가 나중에는 점점 경기에 몰입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었다. 기차시간을 지키기 위해 5회 말까지 경기를 보고 경기장을 나오면서도 내내 뒤를 돌아보았다. 응원석에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멀리서 본 경기장의 관중들은 야구경기와 하나가 되어 장관이었다. 잠시나마 나도 저 곳의 일원이었던 것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집에서도 야구경기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춘기 딸과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좀 피곤할 뿐이다.
그래, 이제 중학교 1학년인데 공부보다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걸 해봐야지. 딸은 또 야구경기를 예매한다. 토요일 경기는 자리가 없다. 다음 주에도 일요일 경기를 보러 가야겠다.
처음 야구장에 갔을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유니폼을 사주지 않았는데, 이번에 가면 하나 사줘야겠다.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도 새기고. 아이돌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야구 좋아하는 게 더 좋을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딸, 너의 방 서랍에 있는 아이돌 앨범 좀 팔아서 유니폼 사는 데 좀 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