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 캔슬링
작년 11월 말, 눈 덮인 한라산을 올라갔다.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산을 오르는데, 작년에는 한라산을 선택했었다. 등산인원이 제한되어 있고 눈이 많이 내리면 정상에 올라가고 싶어도 올라가지 못하는 한라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왕복 9시간 이상을 걸리는 산에 오르기 위해 아침 7시부터 준비해서 택시를 타고 등산로 입구까지 간다. 아직 날은 어둑하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평탄한 등산로를 두세 시간 여유 있게 올라가다가 급경사지가 나온다. 힘들다는 아이들을 이끌고, 주위의 어른들의 응원들 받으며 우리 가족은 백록담까지 올라갔다. 올라간다고 쉽게 볼 수 없는 백록담을 우리는 맑은 하늘과 함께 보았다. 하산하는 길에는 겉옷과 가방과 모자에 동그란 싸라기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사방은 온통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와 눈 내리를 소리뿐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주차장이 작아서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시대로 나가는 모양이다. 금세 버스가 다 찼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편안히 내려간다.
버스기사가 운전을 하며 통화를 한다. 차가 고장이 난 거 같다는 내용이다.
"다음 정거장에서 모두 내릴게요. 차가 고장이 났어요. 다음에 바로 버스가 오니 그것을 추가 요금 없이 타시면 됩니다."
흔하지 않은 일이라 나의 옆자리에 앉은 딸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다.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이어폰을 꽂고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눈치껏 버스에서 내린다. 텅 빈 버스가 가고 우리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올해 추석에 나의 남동생은 조카들 선물을 고르면서 나의 의견을 묻고 있다. 요즘 한창 배드민턴에 빠져있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에게는 배드민턴 라켓을, 중학교 1학년 딸에게는 아이팟을 선물해주고 싶어 한다. 나는 학생들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걸어 다니는 것이 꽤 맘에 들지 않는다. 위험해서다. 뒤에서 오는 자전거도 피해야 하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우회전하는 차량도 확인해야 한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으면 여간 불안한 게 아닌다.
딸은 1년 전부터 아이팟을 사달라고 했고 나는 이어폰을 꽂고 걸어 다니고, 공부하는 게 싫어서 거절했다. 그래서 남동생이 아이팟을 사주고 싶다고 했을 때 다른 것을 사라고 말렸다. 그러다가 사춘기 딸을 통제하는 건 나의 몫이고 가끔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삼촌의 역할인 거 같아서 나는 아이팟을 사주라고 했다.
딸은 뜻하지 않은 삼촌의 선물에 기뻐했다. 물론 검은색 야옹이 아이팟 케이스는 맘에 들어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굳이 투명케이스를 사겠다고 난리다.
아이팟 기능 중에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있다. 딸과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 손에 아이팟을 놓아준다.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켜준다. 창문에 비가 부딪히는 소리와 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갑자기 사라진다.
'우와, 진짜 좋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역시 '위험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 노이즈캔슬링 기능은 최소한으로만 사용해야 해. 특히 거리를 걷거나 대중교통을 탈 때는 안돼. 아, 그리고 독서실에서도 반대야. 엄마랑 있을 때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써도 돼. 그땐 엄마의 세상의 소리를 대신 들어줄 수 있으니. 그리고 너에게 알려줄 수 있으니.
딸, 아직은 원하는 소리나 음악을 골라서 듣는 거보다는 비 오는 소리, 눈 오는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해. 너는 아직 세상의 소리를 다양하게 들을 나이야.
엄마는 가끔씩 작년에 한라산을 내려오다가 싸라기눈 내리는 소리를 찍은 동영상을 가끔 봐. 너도 언젠가는 이런 소리들을 좋아할 날이 있겠지.
* 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