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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Aug 21. 2021

자유의지 최대의 난적, 뇌과학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화두를 제시한『운명의 과학』

  여러분은 문명이 가져다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유·평등의 정신적 가치일 수도 있고, 정보통신 기술 등의 물질적 가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가 갖은 고생을 한 대가로 얻은 다양한 성과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전 세대가 상상하기 힘든 것을 그다음 세대가 이뤄내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을 금방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리는 파괴적 혁신을 끊임없이 일궈낸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대단한 행보를 보여 왔다.


  상호 존중과 연민, 그리고 지성과 자유의지는 지구 역사상 단일 종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인간이 다른 생물 종에 비해서 상위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표식의 역할을 해 왔다. 절제를 알고 도덕을 아는 지성체가 그 정도의 표식을 스스로 부여하는 것에 모든 이들이 수긍했으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에도 존귀함과 신성함이 둘러졌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천부인권을 가진다는 민주주의 기본 이념이 이러한 인식에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 인류가 뇌과학의 영역에 들어서면서, 특별한 존재로서 가진 자부심의 근원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발전을 거듭한 기술의 힘으로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해부도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고차원에 진입했지만, 공든 탑의 건설자가 고생 끝에 이룬 아이덴티티를 스스로 떼어내야 하는 위기를 마주한 것이다. 『운명의 과학』에는 이 거대한 딜레마에 맞닥뜨린 인간의 고뇌가 녹아들어 있다.




낭만적 사랑을 시작할 때의 뜨거운 열정은 기본적 번식 욕구의 부작용인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연구에서 사랑에 빠질 때의 황홀한 감정은 번식과 관련된 모든 관심을 유망해 보이는 특정 후보에게 집중시키게 만드는 일련의 뇌 활성이 만들어 낸 결과임을 입증해 보였다.
(한나 크리츨로우 著 『운명의 과학』, BRONSTEIN, p.132)


  삶의 동반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유의지와 본능 중 어느 쪽이 자신의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뇌과학의 문을 열어젖힌 인간이 받은 답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단호하다. 사랑 역시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려는 본능에 의해 촉발되는 부산물이며, 파트너를 선택하는 행위는 자신과의 유전 조합에서 좀 더 나은 조건의 후손을 만들 수 있는 짝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자유 의지가 끼어들 여지는 많지 않다. 조건만 맞으면 본능에 불이 붙으며 유전자의 의도대로 자손이 탄생하는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운명의 상대'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지금 보이는 상대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조건을 가진 사람과 마주치면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욕구의 영역에서 이성이나 의지보다는 본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뇌과학의 주장에 거부감이 들 수는 있지만, 결국 수긍하지 않을 수는 없다.



…개인의 수준에서 보나 식욕은 대체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유전자 안에 새겨져 있으며 뇌 회로도 이미 그런 식으로 배선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식욕은 오랜 세월 동안 특정 음식을 더 맛있다고 여기도록 진화해 온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위의 책, p.88)


  우리의 DNA에는 수만 년 전을 살았던 조상의 경험이 녹아든 본능이 자리해 있고, 그에 따라 기회가 있을 때 당분과 지질을 섭취하는 식습관이 디폴트로 설정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만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체중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본능이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파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스파라거스와 케일을 마카롱과 카스텔라만큼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은 어려우며, 야식과 후식의 유혹을 매번 뿌리치고 헬스장으로 곧장 달려가기를 선택하기도 쉽지 않다.


진화는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성을 가진 궤도 위에서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인 수많은 인과관계가 만든 진화의 궤도를
단기간에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쯤 되면 자유의지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것 이상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이 DNA가 시키는 명령을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자유의지가 설 곳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 뇌 기능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뇌의 특정 신경로에서 전류를 바꿔주면 질병에 따라오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증상을 지우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가장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행동까지도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관찰하는 것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위의 책, p.116)


  현대 의학의 힘으로 약물을 주입하거나 전파를 뇌에 흘려보냄으로써 병을 고치거나 병적인 정신 상태를 완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의학의 선구자들이 뇌 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반사회 성향을 가진 이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뜻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획기적 기술로 난치병을 치료한 뉴스 기사에 연장선을 그어 보면 무거운 시대적 과제에 금방 도달하게 된다. 의학적 조치 한 번으로 사람의 정신과 행동을 교란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악용되었을 때 얼마나 큰 파급력이 발생할 것인가? 자유의지 개념이 약물과 전파의 침입 앞에서 무력한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민주주의 철학이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투쟁 끝에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올라서서, 스스로 다른 동물 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지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인 자유의지와 지성이 흔들리면,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 특별하다는 자긍심의 마지노선이 무너진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고양이나 소와 다를 것이 없는 '유전자 운송 기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인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을 우리 손으로 뽑아내야 한다. 정체성을 격하하는 과정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힘겨울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불러온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면서 다시 한번 질문을 해 본다. 자유의지, 선택의 여지라는 개념은 정말로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기존에 자유의지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그런 환상이 깨지는 바람에 허무주의자나 이데올로기 이론가가 되는 모습을 생각하면 심란해진다. 이것이 바로 타고난 집단의식이 존재하고, 인류에게는 이타주의와 연민의 잠재력이 있다는 신경과학적 논거를 구축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이유다.
(위의 책, p.319)


  유전자가 사람의 성향과 욕구를 결정한다는 뇌과학의 설명을 받아들이면, 삶에서 우리 손에 쥐어진 결정권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음식을 선호하는지, 어떤 직업에 더 이끌리는지조차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선택의 여지가 어디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저자가 제시한 이타주의는 자유 의지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성을 가질지도 유전적으로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완벽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중간 지대에 있다. DNA 중심의 생존 본능을 강조하는 주장은 경제적으로 사람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는 있으나, 일면식도 없는 어려운 처지의 이들을 자발적으로 돕는 이타적인 행동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유전자의 명령대로라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연고도 없는 이에게 할당할 유인이 전혀 없지만, 실제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이타적 행동은 주위에서 생각보다 흔하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비록 뇌과학의 거침없는 진격에 많은 영토를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자유의지가 쥔 마지막 카드는 인류가 일궈낸 최고의 역작인 사회적 연대이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 훨씬 전부터 존재한 협력적 습성은 오랫동안 유전자를 타고 내려오며 개량을 거쳤다. 여러 번의 보수를 거친 요새는 밀려오는 뇌과학이라는 호적수의 상대로 손색이 없다. 이제 우리는 뇌과학의 중대한 도전에 대해, 그리고 다가올 세상의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전통적인 특기를 발휘하여 진화의 궤도를 계속해서 개척해 나가야 한다.





  행위 동기를 설명하는 원리는 오랫동안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었고, 행동에 납득할 만한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단순한 답이면서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고양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적용해 왔다. 뇌과학이 베일을 벗기자 우리는 본능에 둘러싸인 자유의지의 영역이 얼마나 작은지 깨달았다. 또한, 신성불가침의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던 정신이 외부의 개입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연약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과학과 논리로 무장한 뇌과학 앞에서 우리를 상징하던 추상적 가치가 허물어지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뇌과학은 소중한 문명 발전의 성과다. 인체에서 가장 복잡한 기관인 뇌를 탐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은 발전했으며,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싶은 욕구와 경제적 유인은 앞으로도 신비의 베일을 걷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과 점점 더 자주 부딪히고 있다. 피조물인 뇌과학으로 인해 창조주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아이러니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것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인간은 장기간에 걸쳐 생존 노하우를 축적했고, 딜레마적 상황에서 자신을 수정해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는 인간이지만, 그 전적을 이루게 한 원동력을 부정하는 새로운 유형의 상대와의 싸움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유의지의 패권 상실보다 더 큰 내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딜레마를 해결함으로써 진화를 달성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진 존재에게 후퇴의 여지란 없다. 뇌과학이 불러올 거대한 파도에 맞서, 새롭게 정체성을 가다듬을 인간의 도전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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