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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14. 2021

공간, 건축, 그리고 삶과 사회

『공간의 미래』로 건축가의 시선을 빌리다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가지는 것이 많아지지만, 그에 따라 존재를 당연시하는 것도 많아진다. 삶과 접촉하는 면적이 넓을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는 스마트폰이 무슨 원리로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데이터를 전달받고 원하는 매체를 보여주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결과로 우리 눈에 동영상과 사진이 비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집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이들이 전례 없이 좋은 주거 환경을 누리고 있지만, 늘 몸담고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그 존재와 가치를 당연하다고 느끼게 한다.


  글쓴이 역시 거실과 안방, 그리고 방 두 개가 있는 25평 정도의 아파트를 삶의 표준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평범한 일상에 익숙해져 있다. 매일 비슷한 풍경을 보며 살아가다 보니 주위의 모습들이 삶에서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이따금 멈추어 서서 방 구조나 집 밖의 건물들이 어떻게 재배치되면 더 효율적이거나 보기 좋을지 1분 정도 고민하는 것에 그친다. 회로가 매번 비슷한 곳에서 멈추다 보니 사고 자체가 굳어버린 셈이다.


  의미 부여로부터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이듯이, 공간과 건축도 대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삶을 재구성할 수 있음을 체감하는 순간이 불현듯 찾아올 때가 있다. 이색적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 이들의 경험이 조명되거나, 처음 들른 카페의 창의적인 구조를 보고 감명을 받았을 때가 그러하다. 하지만『공간의 미래』라는 작은 창을 통해, 우리는 굳이 움직이지 않고도 공간의 의미에 대한 심도 있는 해석과 풍부한 교양을 한 손으로 다 잡을 수 있다.


  


어렸을 적에는 신발 한 켤레로 일 년을 살았다면 지금은 여러 켤레의 신발을 가지고 있다. 옷도 더 늘어났다. 소유한 물건이 몇 배 늘어났다. 발코니 확장을 통해서 얻은 공간이 있었기에 물건을 더 살 수 있게 됐다. 발코니 확장은 우리나라의 소비를 확대시켰고 결과적으로 제조업을 활성화시킨 '공간적 촉매제'가 되었다.
(유현준 著 『공간의 미래』, 을유문화사, p.27)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관계가 누적된 결과다. 지극히 당연시되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적 함의가 섞여 있다. 25평, 방 세 개, 화장실 하나 혹은 둘로 이루어진 아파트의 교과서적 구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시화의 산물인 핵가족화와 개인화, 그리고 도시 생활에 맞는 루틴이라는 여건을 가장 효율적으로 품을 수 있는 것이 그러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글쓴이가 그 존재의 의미를 알고자 노력했던 발코니(베란다)에 대한 대답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물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향유하게 된 현대인에게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옷장과 서랍장, 책장을 방에 더 두기는 부담스럽다. 보관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발코니가 표준화한 아파트 디자인에 합류한 것은 팽창하는 물질문화에 따른 필연이었던 셈이다.


  화장실 두 개가 아침 일찍 학교와 직장에 나가야 하는 가족의 필요를 반영한 것이고, 발코니가 불어나는 소유물을 감당하기 위한 수요를 끌어안은 것이라면 집의 다른 공간 역시 재해석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이를 테면 안방은 부부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복도에서 거리를 두도록 배치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외식과 배달 주문 빈도가 늘어나 일상에서 요리의 비중이 낮아져 주방이 작아지고, 구성원 각자의 공간 확보가 중요시되어 방 면적 확보가 필요해지자 거실도 따라서 작아져 작은 주방과 거실이 공간적으로 연결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평범함도 돌아보면 의미 부여의 여지가 충분하다

    이 세상에 평소에 생각하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일상에 상상력을 얹음으로써 공간에 제한된 틀을 깨고 사고의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내가 만든 '공간과 권력의 제1 원칙'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사람을 모아서,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면 그 시선에 모이는 곳에 권력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 당연히 높은 곳에 올라가서 차지하는 사람은 소수고 이들은 수많은 사람의 우러러 보는 시선을 받게 되며 소수의 권력자가 된다.
(위의 책, p.68)


  회의 때 길쭉한 테이블의 짧은 모서리 쪽에 앉아 있는 사장님과 수업 시간에 교단 앞에 서서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을 감싸는 공간적 배경이 그들의 권력을 표상한다는 해석이 무척 흥미롭지 않은가?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회의에 감각이 무뎌진 회사원과 학업에 치여 사느라 독창적인 상상을 할 시간이 없는 고등학생 입장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날아올라서 뻔해 보이는 공간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심리학과 경제학, 역사학, 과학 중 어느 하나도 개입하지 않은 인위적 공간이 없다는 사실에 예외가 없다. 시선을 집약해서 가져갈 수 있고 다수의 시공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란, 시선을 주는 이들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자유의 일부를 손에 넣는다는 것을 뜻한다. 구도에서 중심을 장악하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룰을 만들어 적용하고, 위계질서의 상단에 올라 권위를 향유한다.


  신생 기업들이 회의실과 개인 공간의 디자인을 혁신해 유능한 사원들이 신세대 문화를 만끽하는 장면이 이따금 방송에서 조명되곤 한다. 기존 공간을 재설계하고 개방적인 설계를 취하는 것은, 이전 설계에서 철저히 계획된 권력 구도의 해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회의실의 색상이 다채로워지고 설계가 다채로워진다고 해서 없던 독창성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테이블의 변형으로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질 수 없게 되면 공간적 위계는 시각적으로 허물어진다. 어쩌면 신흥 IT 기업들의 의도는 독창성 고양보다도 권위 질서의 해소가 아니었을까?



…5G 기술을 이용한 자율 주행 로봇은 헤드라이트도 켤 필요가 없고, 사거리에 신호등도 없이 교차로를 지나다닐 수 있다. 이동 속도와 흐름이 인간이 운전하는 교통수단과 비교가 안 되게 효율적이다.
(위의 책, p.189)
혹자는 스마트폰 데이트앱이 발달하면 클럽에 안 가도 되지 않겠냐고 말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데이트앱이 아무리 발달해도 젊은이들은 이태원 클럽에 가서 놀면서 동시에 그곳에 없는 홍대 클럽에 있는 사람들을 데이트앱으로 확인할 것이다.
(위의 책, p.168)


  기술의 진보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언택트의 진행을 크게 앞당기면서, 사람들은 움직일 필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굳이 문 밖으로 나서지 않아도 대가만 지불하면 물건을 받아볼 수 있고, 교통체증을 뚫고 방역 수칙을 지켜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고 침대 위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재택근무가 이전에 비해 늘어나면서 일상 대부분이 펼쳐지는 무대의 폭이 줄어들고 있다.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는 것은 시간 절약과 편의성을 모두 누리게 하는 특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람은 새로운 곳을 찾아가 새로움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이색적인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인생에 진한 기억을 남기는 것뿐 아니라, SNS가 활성화한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이 누린 순간을 타인과 공유하는 수단이 된다.


 물리적 공간에 투영되는 이 두 욕망은 일견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움직이고 싶지 않다'와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의 병존이 현대인의 삶과 사고방식을 훌륭히 녹여낸다.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환경 속에서 불필요한 움직임은 최소화하되, 자신을 매혹하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 것이 만족감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된다. 엄격한 방역 수칙이 존재하고, 왕복에 시간과 비용이 걸리기까지 하는 클럽이 내뿜는 매력을 젊은이들이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언택트 시대는 사람들의 이동을 줄이면서 많은 오프라인 플레이스의 존재 가치를 반감시킨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한 위기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 유익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장소는 다른 곳으로 향할 방문자의 발길까지 돌려놓는다. 달리 말하면,


선사할 수 있는 매력의 크기에 따른 고객 수의 빈부격차가 벌어지며,
공간의 운명이 건축에 좌우된다.

  대상이 아무리 가치가 있어도 그것을 알아봐 주는 이가 없으면 의미가 퇴색된다. 공간이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 사람들에게 의미를 각인시킬 수 있으려면, 대중의 주목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관심이 셀럽들에게 부를 안겨주는 원천인 것과도 굉장히 닮아 있다. 건축에는 삶뿐 아니라 사회가 녹아들어 있는 셈이다.



저소득층은 돈이 없기 때문에 비싼 집을 살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집을 절반만 지어서 분양했다. …집을 마련한 사람은 입주 후 돈을 벌면서 점점 자신의 집을 완성해 나갔다. …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각각의 집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위의 책, p.290)
세종시를 보면 도대체 어떤 부분 때문에 혁신 도시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눈에는 어디를 가나 자동차를 타고 가야 하는 엄청나게 높은 아파트만 많은, 그냥 지방 도시일 뿐이었다. … 서울의 집중화는 지방의 개성이 없어진 탓도 있다.
(위의 책, p.304)


  건축은 삶을 담는 공간을 빚는 행위인 만큼, 삶과 사회의 고뇌도 뒤섞여 있다. 높이 30m의 두부 같이 생긴 아파트들이 이루는 숲은 20년 전 3~4인 가족이 대세던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 유형의 세대에 최적화한 건축이 오랫동안 이어진 결과로, 우리는 어디를 가나 비슷한 도시를 보고 있다.


  표준화는 효율화라는 욕망의 산물이다. 대세를 읽어 그것에 맞추기만 하면 여러 번 고민할 필요 없이 다수의 소비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표준화에 골몰하면 변화와 다양성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한다. 다양성과 역동성이 결여된 공간 풀은 매력을 어필하기 어려우며, 현상 유지 관성에 젖어 변화의 폭도 한정된다.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할 유인이 없어지게 되어, 모두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건축도 보편성을 끌어안으면서 어떻게 특수성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삶이 풍요로워지면서 건축은 점점 더 많은 질문에 동시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사용자에게 시각적으로 새로운 인상과 실용적 기능을 제공하면서, 에너지 효율을 끌어올리고 자연과의 공생을 효과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개인과 사회의 목소리를 모두 들어주기 위해 건축가들은 독창성의 끝을 달리는 설계를 고안하고 있고, 그 피나는 노력이 도시공원과 낯선 모양의 신축 아파트라는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공간은 문명과 소통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아이디어와 기술의 힘을 빌려 건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삶과 사회 그리고 시대와 문명이 어떤 모양을 가지고 어떤 의미를 담아내는지 알아갈 수 있다.



  



  24년의 삶 중 21년을 지방 중소도시와 어촌에서 보낸 글쓴이가 건축에 관해 처음 호기심을 가졌던 것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였다. 직육면체의 고층 건물이 즐비한 도심에 홀로 곡선 디자인을 뽐내는 DDP를 보면서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건축과 디자인 이론에 대해서 문외한이어도, 그것이 건축적으로 그리고 디자인적으로 훌륭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건축'이라는 단어에서 친숙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일상의 배경인 집과 회사, 학교에 눈이 너무 익어버렸기 때문에 의미를 발굴하기 어렵고, 건축 행위는 대규모의 비용을 유발하다 보니 인생에서 자신이 그것에 직접 관여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을 경제적인 의미에만 결부시킨다.


  그러나 상기했듯 건축은 단순히 경제 활동의 일종이 아닌, 삶을 담는 그릇이자 시대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오늘날의 아파트는 안정과 효율, 편의를 추구하는 우리의 욕구가 집약된 결정체이며, 아파트와 공원이 모인 단지는 주거와 환경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을 보아야 하듯이, 삶과 세상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건축이 일구어 놓은 풍경의 함의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이 정말로 어떤 곳이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이해하기 위한 과정은 사소한 것으로 시작된다.


  정해진 답을 찾아야 하는 조바심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대답을 내놓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풍경은 우리의 희망을 더 많이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건축은 디자인으로 쉽게 사회적 가치를 만들 수 있는 분야다.
이는 어느 누구의 희생이 필요한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p.338)

  건축은 눈에 보이지만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았던 세상의 모습,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실마리를 보여준다. 주위 모든 것에 세심한 눈길을 줄 수 있는 아량이 있는 이들에게, 본서 『공간의 미래』가 페이지 속에 숨겨둔 선물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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