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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Oct 11. 2021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 경계선 앞에서

세계사의 6번째 혁명은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인가

  인류가 이룩한 위업 중 가장 간과되기 쉬운 것은, 디스토피아 이론을 몇 번이고 불식시킨 점이다. 상업혁명 이후 빠르게 증가하던 인구 추이를 보고 맬서스는 많은 이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지만, 산업혁명으로 급격히 발달한 농경 기술이 절멸의 시나리오를 백지화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파괴력을 가진 원자폭탄이 미국과 소련에 쥐어지자 문명의 멸망이 코앞에 다가오는 듯했지만, 상호확증파괴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대규모 전쟁을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세상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더 살 만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미래에 꼭 재현되리라는 법은 없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계속 변화하고 있고, 이전에 없었던 것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과학과 기술은 일반적으로 세상의 모든 원리를 이해하는 가이드이자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처방이지만, 이제 과학기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알지 못한다는 점은 항상 공포와 불안을 야기하는 법이다.


  메타버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물리학. 우리는 이들이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이들을 가지고 인간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미래는 유토피아가 될 수도 있고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세계사의 다음 대혁명은 무엇으로 기록될 것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의 파괴력은 커지고 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마찬가지이다. 석탄 발전소는 싼 원료로 많은 전기를 생산하지만, 그 대가로 대량의 대기 오염 물질을 발산한다. 인공지능도 유능한 근로자를 도와 직무 수행의 효율성을 더 끌어올릴 수 있지만, 그 대신 숙련도가 낮거나 단순한 페이퍼워크를 맡고 있는 직원의 입지를 없애버린다. 기술이 휘두르는 칼의 양날은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진보를 가져온 일련의 기술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왔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화력 발전소가 없었다면 각지의 문명이 빠르게 커져가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발전에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일자리가 소멸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인공지능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직장인들이 소중한 시간을 길 위에서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줄 자율주행 자동차의 개발을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기술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제에 인간은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기술의 파괴력이 제한적으로 발산하고 있다

  인간은 몇 번이고 신기술을 내놓기 직전에 고뇌를 거듭해 왔다. 불필요한 반복 작업을 기계에 맡기는 행위가 동일한 일을 하는 이들의 일거리를 박탈하지는 않을지, 혹은 감히 생물 종 중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유전자에 손을 대서 장기는 물론 생명을 의도대로 편집할 권리가 있는지 등의 질문은 일반인의 머리도 아프게 한다.


  그러나 기술의 딜레마에서 항상 인간은 죄책감보다는 진보에 대한 열망을 선택했다. 더 나은 기술이 더 큰 부를 가져며, 결국 그것으로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수혜자가 된 역사적 과정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술의 발달이 그토록 급속도로 전개될 수 있는 이유는 자본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이 갖가지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과학기술에서 찾는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계는 인간이 하기 버거운 일부터 맡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인간은 반복적인 업무를 차차 기계에 넘겨주기 시작했다. 기계가 도맡은 영역이 첨단 제조업까지 퍼졌을 때에도 인간은 위기감을 느끼기보다는 기계가 발휘하는 생산성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패턴은 중대한 국면 전환의 기로에 놓여 있다.


  방적기는 노동자보다 빠르게 실을 뽑아낼 수 있었고, 심지어 쉬지도 않고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반도체 속의 극소 단위 공정에서 기계는 인간의 손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 기계가 사람보다 계산도 더 잘할 수 있고, 운전도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다면? 인간보다 비용 대비 더 나은 생산성을 창출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생산성의 역전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한 곳에서 일어난다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따라 직업 세계가 파편화하며 프리랜서와 멀티잡, 긱 이코노미의 비중이 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단발성 계약에 수입이 의존하는 이러한 활동 형태에서는 소수에게 많은 시장 가치가 집중된다. 점점 노동을 대체해 갈 인공지능에 의해 밀려날 사람들이 인플루언서들의 시장 지분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가지지 못한 이들의 좌절은 여러 방향으로 표출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1인 1표 원리는 구성원 간의 정치적 영향력의 불균형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막강한 자금력과 정보력 그리고 상호 결탁을 통한 권력을 가진 소수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자본주의는 불균형을 자양분으로 삼는 존재다. 인플루언서가 세간의 관심과 돈을 쓸어 담고, 과학기술 개발의 선두주자인 대기업이 데이터와 이윤을 독식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장기적 양립에 대한 도전으로 작용할 것이다. 경제적 역량의 격차가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적 역량의 격차로 귀결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인당 GDP, 노동생산성은 꾸준히 우상향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는 풍요와 편의가 확대되는 절대적 진보로 문명이 유토피아를 향해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방면에서 승자독식이 굳어진 디스토피아를 예고하는 '평균의 함정'에 불과한 것인가?



  인류사의 여섯 번째 대혁명이 기술에서 나올 것은 확실하다. 문명의 궤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파워를 가진 것이 그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후보군 중에서도 가장 유력해 보이는 존재는 바로 '경계 파괴 혁명'이다.


  인간은 줄기세포로 장기를 창조할 수 있으며, 생명도 복사할 수 있다. 그동안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장기와 신체 부위의 대체가 필요했던 이들에게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한 줄기 빛과 같다. 머지않은 미래에 장기 기증 부족으로 인해 수술을 받지 못하여 세상을 등질 수 있었던 이들이, 구원의 손길을 받아 천수를 다하는 스토리가 익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의학의 힘이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면 어떨까?


  이미 하버드대에서는 연구자들이 노화를 제어하기 위한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유전자 단위의 세계를 철저히 해독해 그들의 의도대로 노화를 지연시킬 수 있다면, 그 시점부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인간에게 부적절한 칭호가 될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장기를 기계식으로 대체하고, 유전자의 작동을 인위적으로 편집하여 늙지도 않는 동물을 선대와 같은 범주에 묶는 행위가 타당성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기존의 정의에서 이탈한 초인간 개념은
미래 세계의 명암을 좌우할 것이다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풍요로운 세상에서 모두가 기술의 혜택을 받으며,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아가는 유토피아 시나리오다. 그러나 자원의 희소성과 자본의 논리는 결코 그런 미래를 호락호락하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경제력과 권력을 틀어쥔 승자독식 사회와 초월적인 과학기술 사이의 그릇된 결탁은, 소수의 초인간이 다수 위에 군림하는 디스토피아로 직결될 것이다.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인간과 문명은 분명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화의 몫이 모두에게 돌아가야, 진정한 문명의 승리이자 인간의 위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더 많은 구성원에게 나아진 세상의 혜택을 제공하는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성과에 도취되어 앞으로도 그런 추세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 방심해선 안 된다. 기술은 모두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인도자가 될 수도 있으나, 소수의 이익에 봉사하며 다수를 도태시킬 저승사자가 될 수도 있다.


기술의 칼날이 우리가 아닌 고르디우스의 매듭만을 벨 수 있도록
방향과 힘을 조절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이다

  곧 찾아올 중대한 분기점에서 문명의 번영과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의 보존을 다 잡기 위해, 모든 이들이 지금부터 관심을 가지고 공론장에 나서야 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미묘한 알력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합리화하지 못하게 하고, 승자독식 구조가 초인간과 하급 인간의 분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모두의 관심과 참여만이 운명을 유토피아 시나리오에 가깝게 끌어당길 수 있다.


  인류사 최대의 시험대가 다가오고 있다. 역사의 여섯 번째 챕터가 이미 작성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빈 페이지에 조심히 본문을 써 내려갈 시간이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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