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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Oct 04. 2021

붉은 여왕의 손을 잡은 과학기술

끝나지 않은, 끝나지 않을 산업혁명

  여러분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유명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이지만, 주인공이 겹친다는 것 외에 중심 내용에서 큰 공통점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붉은 여왕은 앨리스에게 '이곳에서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있는 힘껏 달려야 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건넨다. 여왕의 나라에서는 어떤 것이 앞으로 움직여도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동일한 속도로 같이 움직이므로, 다른 것들을 앞지르고 싶으면 더욱 빠르게 내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화학 속 '붉은 여왕 가설'의 골자다. 야생에서든 시장에서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최선을 다해 자신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거나 혁신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는 존재는, 어디서든 결코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 우리는 시장 경제 속에서 붉은 여왕 가설이 통용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남들보다 저렴하게 양질의 재화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재화를 저렴하게 만들려면 생산 규모를 늘려 규모의 경제 효과를 노려야 하고, 양질의 재화를 만들려면 기술을 고도화해 사람들이 원하는 특질을 계속 강화해야 한다. 결국 시장에서의 승리는 기술력이 좌우한다. 경쟁자를 압도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해 압도적인 우위를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 기술 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통해, 산업혁명은 그 생명력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독립한 지 아직 250년도 채 되지 않은 젊은 국가다. 출발이 한참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에는 기술의 역할이 가장 컸다. 강인한 개척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미국 대륙을 누볐고, 독립에 즈음하여 영국의 산업혁명이 발생하는 행운이 찾아왔다. 사업가들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술을 이용해 막대한 이윤을 생산하는 기업을 일궈냈다.


  신생국이었던 미국은 유럽 열강에 비해 개발의 여지가 굉장히 많았으며, 그것은 곧 기업이 성장하고 이윤이 창출될 여지도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했다.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가 놓이고, 정유 공장과 자동차 제조 공장이 줄줄이 들어섬으로써 미국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자본에 대한 열망이 시장의 경쟁과 기술 혁신을 가속했으며, 더 높은 차원의 혁신에 대한 고민이 헨리 포드의 조립 라인 개념과 프레더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으로 연결되었다.


  기술의 집산인 도시가 이러한 변화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고도의 건축기술이 구현된 고층 건물과 최신 기술로 판매고를 쓸어담는 기업, 그리고 핵심 인프라인 철도와 항만을 품은 도시가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젊은이들은 학문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좋은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폭증하는 인구는 아이디어의 교류를 자극함으로써, 인구 증가율을 상회하는 특허 출원 증가율을 만들어냈다. 자본과 기술, 산업, 아이디어가 이루는 발전 메커니즘에 힘입어 미국은 건국한 지 150년도 채 안 되어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철강왕과 석유왕, 발명왕의 고향인 미국은 혁신의 용광로였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혁신이 문자 그대로 파괴적인 방향으로 발현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 순간,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화기가 냉병기에 비해 위력적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무리 발달한 총이나 대포도 살상력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시대적 광기가 난무하던 20세기 초, 기술 경쟁이 적을 뛰어넘는 살상력을 발휘할 무기의 발명으로 번져 강력한 생화학무기와 핵무기가 탄생하자 이야기가 180도 바뀌었다. 광범위한 지역을 타격해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칠을 아연실색하게 한 원자폭탄은 결국 1945년 실전에 투입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극을 경험한 일본은 항복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자는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은 것을 두고, 상호확증파괴 전략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의 발전으로 평화가 유지되었으니 결국 이것을 기술의 파괴성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실제로 원자폭탄이 전쟁에서 사용된 것은 아직까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례뿐이며, 전례 없는 규모의 세계대전이 두 차례 발발하여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전쟁의 빈도는 20세기 이후 계속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원자력 기술은 미래 지향적 전기 생산 도구라는 이점도 갖고 있지 않은가.


과학기술은 커져가는 인류의 문명을 지탱하고 확장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이나, 동시에 문명을 궤멸할 수 있을 만큼의 파괴력을 가진 존재로 성장했다

  반론에도 일리가 있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는 목적성이 없는 것으로, 인간이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역사 속에서 인간이 기술을 자신을 위해 적절히 사용해 온 결과,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위력과, 높아져 가는 기술에 대한 의존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도나 사용 방식이 잘못되면 과학기술은 언제든 우리의 목을 겨냥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자본, 기술, 산업, 그리고 아이디어가 이루는 상호발전 메커니즘의 폭발성에는 방향성이 정해져 있지 않다. 시장과 국가 간 기술 경쟁이 일상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로봇과 작업을 효율화하는 앱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끔찍한 살상 무기나 개인 정보를 빼가는 프로그램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기술의 힘이 초월적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시대에, 기술의 목적성을 확정하고 그것을 감시하는 것이 기술 개발만큼이나 중요해진 것이다.

  

 

 궁극적으로, 산업과 과학의 만남은 '어떻게 하면 생산량을 효과적으로 늘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들의 만남을 주선한 자본의 논리는 산업과 과학이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도록 하는 촉매가 되어 주었다. 과학은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호기심에서 출발했으나, 원리를 규명하고 그것을 산업에 적용해 많은 돈을 벌겠다는 욕망이 포개지며 기계의 고도화를 이끌었다. 한 번 혁신의 궤도에 오르면 뒤를 돌아볼 수 없다. 기술의 혁신 주기는 그렇게 점점 단축되어 간다.


  기술의 발전이 가지는 관성과 더 나은 상태를 지향하는 인간의 욕심,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자본의 특성이 맞물린 이상 기술 발전의 톱니바퀴를 인위적으로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높은 수준의 물질 문명을 추구하는 다수의 욕망을 거스르며, 이익단체들의 목표와 상충한다. 


끊임없는 경쟁으로 기술을 단련하는 이들의 에너지를 억누르는 것보다는,
그 에너지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터져 나가지 않도록 제어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산업혁명 사이에 교차점이 생긴 순간부터, 과학기술은 붉은 여왕의 손을 놓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기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계의 수재들과 산업계의 머리들이 그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우리는 그 노력의 결실을 보고 감탄하면서 통장의 잔고를 계산한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가 건넨 돈으로 혁신의 터빈은 끝없이 작동한다.


  산업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위 과정이 반복되는 한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경이롭도록 발전을 거듭하는 세상 속에서 과학기술의 결정체를 이용하며 편의와 여유를 향유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를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을 누리기 위해 지불한 돈은 그것을 사용할 자유뿐 아니라, 그것이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감시할 책임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산업혁명의 원류, 르네상스에 영감을 준 고대 그리스 시대에 과학은 세상을 보다 타당한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동기로 탐구되었을 것이다. 당대에는 과학을 연구하고 기술을 개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오늘날만큼 크지 않았다. 피타고라스가 순정률 개념을 만들어내고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둘레 길이를 계산한다고 해서, 그들이 획기적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에 대한 보상을 얻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발생한 산업의 발전은 아이디어에 경제적 유인을 결부시켰다. 혁신 동기를 가진 산업은 과학적 아이디어를 이용해 기술을 개발해 왔고, 그로 인해 많은 부가 창출되고 세상의 신비가 상당 부분 벗겨졌다. 아직 인간이 기술로 구현할 수 없는 것도 많고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지만, 여태까지의 성공 사례와 발전 추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과학기술적 해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유전자 편집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전자 조작을 넘어, 인위적으로 생명체를 복제하고 희귀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수단적으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맞춤 아기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생명체의 영원한 로망, '불로불사'의 영역에도 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비단 생명공학뿐 아니라, 과학의 전 분야에서 한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상과학 소설 속 설정으로 취급되던 일들과 현실 속 이야기의 공통분모가 커지는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혁신의 열차 속에서, 승객인 우리는 속력이 계속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종착역은 요원하다. 사실 종점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기장인 과학기술은 그저 붉은 여왕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심적으로 늘 쫓기고 있는 기장과 점점 빠르게 사라져 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승객들이 무한히 연장될지도 모르는 산업혁명이라는 레일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이 현재의 구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일지도 모른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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