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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Oct 08. 2021

숫자, 데이터, 그리고 디지털 혁명

지능을 가진 분신, 컴퓨터의 탄생

  문자와 숫자, 그림 같은 것으로 기록을 남기는 행위가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누구나 체감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많은 것에 관여돼 있을수록, 할 일이 많을수록 기록의 효과는 커진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기억하기 위해 메모와 도식을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을 몇 줄 적어 놓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데, 하물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저장할 때는 어떠하겠는가.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정보와 지식을 저장하고 정리하며,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자의 서로 다른 욕구와 필요를 충족하는 중요한 정보는 때로는 안전하게 보관되어야 하고, 어떤 것은 공유되거나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에 의한 기억의 침식과 공간적인 단절에 의한 제약을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인간은 아직도 원시시대 수준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시나리오를 반현실적 가정으로 만들었다. 정보와 지식을 다루는 방법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개발해 왔기 때문이다. 파피루스와 주판을 거쳐 종이와 컴퓨터로 이어지는 정보 처리의 역사는 문명을 세우는 뼈대이다. 세상을 만들어가는 위대한 작업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현대보다 덜 복잡한 사회를 살았던 옛 사람들도 망각이 강력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기억을 침식하는 망각의 마수를 뿌리치기 위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문자는 신성한 종교의 가르침과 교리를 성문화하고 사회 규범을 전달하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숫자는 정확한 거래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록의 가장 근본적인 의의는 신뢰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기록이 보존됨으로써 정보와 지식에는 일관성과 축적성이 부여되었다. 법과 계약에 일관성이 부여되어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 질서를 존중할 수 있었으며, 여러 차례 검증을 받은 경험과 지식이 누적 결과로 안정적인 구조물을 건축하고 효율적으로 계산을 수행하는 방법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문명은 일관성으로 만들어진 뼈대에 축적성이 들어차는 방식을 통해, 점점 정교하고 창대한 모습으로 발전해 갔다.


  이 과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사회만이 장기적으로 번영하는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 기록의 가치를 알아보고 지식과 정보의 끊임없는 업그레이드를 시도하는 국가가, 자신들보다 질서가 느슨하고 문물의 발달 속도도 느린 이질적 집단을 가만 놔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으로 기록은 아주 오래 전부터 문명의 생존에 확실한 도움이 되는 유전자 조각임을 입증해 온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선조가 인지혁명을 겪으면서 단련해 온 추상적 대상을 다루는 능력은, 문명의 생존경쟁을 통해 문자와 숫자 체계의 고도화로 이어졌다. 물질문명과 철학의 발전에 따라 갈수록 늘어가는 개념을 효과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알파벳과 한자가 발명되었다. 그리고 토지를 측량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계약의 내용을 확정하기 위한 노력은 수와 계산의 발전을 견인했다. 권익이 달린 문제에서 사람들의 두뇌가 더욱 활성화했기 때문이다.


  발달된 기록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원활히 작동했다. 문자가 규정하는 룰 안에서 사람들은 숫자를 다뤄가며 효율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와 인도의 현자들이 떠올린 선구적 발상은 문자의 그릇에 담겨 후대로 이어졌고, 중세 이슬람 학자들과 근대 유럽 학자들이 그 아이디어를 수로 변환하여 구체화했다.


  이윽고 자연을 감싸고 있던 물리학과 화학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인지혁명의 첫 번째 산물이었던 신앙은 두 번째 산물인 과학에 입지를 잃기 시작했고, 인간은 만물을 해설하는 신적인 영역에 진입했다. 모든 난감한 문제에 대해 '신의 뜻'이란 간단한 대답을 내리는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 인간은 미적분학과 대수학 그리고 기하학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신의 권능을 손에 넣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지식과 정보는 인구와 같은 속도로 증가한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인구가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수준의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정보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인구를 조사하고 세금을 걷거나, 보험사가 적절한 보험료를 책정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가 너무 많아진 것이다. 넘쳐나는 데이터로 정리부터 처리까지 걸리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졌고, 그로 인해 정보가 부족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비효율을 감내해야 했다.


문명의 발전에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를 풀기 위해
문자와 숫자의 발명만큼 획기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오랜 고민 끝에 인간은 기계에서 영감을 얻었다. 방적기가 실을 잣고 증기기관이 피스톤을 움직이듯이, 명령을 하면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작업을 기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발명품을 고안한 것이다. 인간의 의도를 기계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머리를 맞대었고, 그리하여 일종의 언어가 탄생했다. 컴퓨터란 이름을 가진 그 기계는, 전기신호를 받아 0,1을 나열해 정보를 표현하는 인공 뇌를 달고 있었다.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은 디지털 혁명이 촉발된 순간이었다.


  계산을 효율적으로 해주는 도구에 대한 열망은 유구한 것이었으나, 에니악이 슈퍼컴퓨터로 진화하기까지는 한 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데이터, 그리고 더 높은 수준의 과학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이 컴퓨터를 전력으로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데이터를 순식간에 처리해 줬고, 그 덕에 인간은 정보의 처리에 쓰던 많은 시간을 다른 곳에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자와 기술자가 목적에 맞는 식을 구성하면, 컴퓨터가 그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 분업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지능을 가진 파트너의 출현은 실로 엄청난 혁신을 가져왔다. 이전까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컴퓨터의 등장으로 기계가 지적인 활동에서도 굉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간이 반복적인 연산을 컴퓨터에 의탁함으로써, '기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더 이상 물리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게 되었다.


  컴퓨터의 도래는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과정의 효율을 끌어올리며, 문명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몇 줄짜리 연산은 명령 몇 번에 끝이 나며, 모뎀을 통과하면 소리와 색깔은 디지털화하여 0과 1의 조합으로 변신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데이터의 단순한 수량은 더 이상 골치아픈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기술자들의 공헌 덕에, 고성능 컴퓨터는 차원이 다른 연산 속도를 자랑한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컴퓨터보다 복잡한 수식을 빠르게 계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컴퓨터가 가진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도 간과할 수 없다. 지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지만, 컴퓨터 역시 기계의 일종이다. 비트코인을 채굴하는 컴퓨터들이 사람이었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것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에서 가지는
자신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인간의 역량만으로는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눈부신 문명의 발달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설계도를 그린 것은 인간이지만, 그 작업에 실제로 투입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 기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몇십억 명은 있어야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를 컴퓨터 몇십 대로 처리하고 있다. 세상 곳곳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컴퓨터의 힘을 빌어, 78억 인류는 그보다 몇천 배의 인구가 있어야 만들어졌을 법한 속도로 진보하고 있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현대인은 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거의 모르면서도 그것을 이용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것이 컴퓨터와 인간이 함께 발전해 온 증거이다. 연산과 논리 체계를 고도화하여 구성된 프로그램으로 우리가 사무실에서 문서 작업을 할 수 있고, 작가가 책을 낼 수 있으며, 은행이 자금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인간은 디지털 혁명이 태어난 지 반 세기만에 컴퓨터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인터넷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우리는 디지털 시스템이 세상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지 매일 체감하며 경이로움을 금치 못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컴퓨터들은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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