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의존해 판단을 한다. 하지만 그 경험과 생각이라는 것에는 자신이 보고 들은 범위라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늘 놓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이 겪는 착오는 그 놓친 부분으로부터 비롯되며, 그것은 곧 후회의 근원이기도 하다. 물론 기억을 잘 가다듬어보면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이들이 건네준 조언이 어느 순간에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로 경험은 살아온 시간에 비례한다. 물론 나이든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로부터 머리에 쌓인 광범위한 데이터와 이미지 중 현재의 것과 겹치는 무언가가 존재할 때 그것이 최종적으로 좋은 판단을 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부른다.
아마도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현대사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남은 사람이 2000년대의 첫 10년까지 보았다면, 그는 그 다음 10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강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경험의 누적이 통찰과 지혜로 성공적으로 변환되었다면 말이다. 세계 곳곳을 이어주던 보이지 않는 선이 위태로울 만큼 가늘어지고 있었다. '탈세계화'라고 부르는 변화가 드디어 일반인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개입하지 말자'가 세계를 대하는 미국의 기조가 된다. 무역관계는 시들해진다. 미국은 세계 운송경로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는다. 미국은 동맹국들이 쇠퇴하도록 내버려둔다. 오랫동안 미국의 보호를 받고 사는 데 익숙해진 나라들은 이제 스스로 전기를 확보하고, 국민의 일자리를 유지하고, 국경의 안보를 지켜야 한다.
(피터 자이한 著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김앤김북스, p.227)
미국이 빠르게 치고 올라온 중국을 제압할 방도를 궁리하면서 동시에 진행한 중요한 작업이 있었다. 셰일 오일 혁명으로 풍부한 에너지원을 확보하며 중동에서 서서히 발을 빼는 기색을 보이더니, 동아시아에서도 유사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세계 곳곳에서 '불필요한 비용이 드는' 개입을 줄여 손을 떼겠다는 움직임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노골적이었던 트럼프의 압박은 동아시아에서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미국이 아주 좋은 대가를 받지 않는 이상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한일 양국을 지켜줄 이유가 희미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큰 폭의 방위분담금 지불을 요구한 것, 일본의 재무장 준비를 방관한 것은 그 맥을 같이 한다. 미국이 동아시아에 들이는 군사비와 개입의 폭을 줄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유가에 따라 매일 5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사이를 번다. 우리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그만한 부는 말할 것도 없고,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받는 것이 없다. 전혀. 우리는 독일을 지켜준다. 일본을 지켜준다. 한국을 지켜준다. 이 나라들은 강하고 부유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받는 것이 없다. 이 모든 상황을 바꿀 때가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著 『불구가 된 미국』, 이레미디어, p.64)
과거 미국은 신자유주의를 부르짖으며 세계화를 설파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양을 통하는 선박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원자재는 아프리카와 중동이 조달하고, 공산품 생산은 동아시아 3국이 맡으며, 그렇게 해서 효율적으로 생산한 제품들을 미국이 저렴하게 향유하는 것이 미국에 득이 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화의 효용이 떨어지고 중국을 제압할 필요가 생기자 미국은 40년 전 자신들이 만든 판을 과감히 뒤엎었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자국 대신에 중국에 맞설 대항마를 만들어 동북아에 투입하는 자원을 줄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마침 일본 우파 정치가들은 일본이 군대를 합법적으로 보유할 수 있게 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기에, 미국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일본 정계가 급격히 개헌 논의로 기운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본이 자국의 부담을 줄여줄 의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중 무역 전쟁은 2018년 1월 22일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중국산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관세를 부과한 것이 시작일 것이다. … 하지만 곧바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무역대표부로 하여금 중국에 대하여 500~600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이 미국의 지적재산권을 훔치고 있다고 비난하자 문제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이철 著 『중국의 선택』, 처음북스, p.90)
…위안화 가치가 절상되면 중국은 이전처럼 미국 국채를 대량 매입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가는 미국 정부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이다. 미국 국민은 소비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저축률은 극히 낮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근본적으로 국민으로부터 돈을 조달할 수 없는 상태다. … 중국이 미국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더 높은 금리를 지불해야만 정부 지출을 만족시킬 만한 돈을 차입할 수 있을 것이다.
(왕양 著 『세계 경제 패권을 향한 환율전쟁』, 평단, p.319~320)
이전부터 미국이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것이 위안화가 실제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절상해 그들이 수출하는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낮추고 자국 기업의 수출에 보다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압력 행사였다. 트럼프 정권은 중국을 경제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핵심 수출 품목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으며, 예전부터 존재한 기술 도용 문제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두 경제 거인의 싸움은 한 번 불이 붙자 갈수록 격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중국이 미국의 관세 부과 조치에 보복 관세로 응수했고, 미국은 중국의 주요 기업에 제재를 가하며 가용 전략의 폭을 과시했다. 중국이 친미 성향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안으로서 석유-천연가스의 공급 파트너로 이란을 점찍어 두자, 캐나다에서 이란에 내려진 경제 제재의 관련 사항을 어긴 중국 인사가 체포된 것 역시 양측 간 치열한 경제 전쟁의 편린이었다.
양국은 경제전쟁이 양측 모두에 손해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입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면 그 상품을 이용하는 자국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위안화가 절상되면 미국 기업은 수출 경쟁력 부담이 줄어들지만, 미국 소비자들은 이전보다 비싸진 중국 상품을 사거나 질적으로 만족을 못하더라도 더 저렴한 외국산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 GDP에서 무역 의존도가 높은 중국은 무역 마찰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손해를 본다.
중국에 대한 불만이 미국에서 반중국 여론을 형성하고
입법 행동을 부추겼으며 경제 관련 의제를 규정했다.
(스티븐 로치 著 『G2 불균형』 중에서)
그러나 각국 수장들의 정치적 계산이 세계를 퇴로 없는 싸움터로 몰아넣었다. 미국 정치가들은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지위와 자국의 저축 부족으로 인한 고질적인 무역적자 문제를 위안화의 탓으로 돌리며, 중국을 교역의 악마로 규정해 유권자들의 분노를 표로 바꾸려 했다. 중국의 야심가들도 미국과의 경제전쟁으로 인해 발생할 자국민들의 경제적 피해보다, 미국을 적으로 설정하여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정치적 이익을 중요시했다.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미국이 지고 있다는 이유로 위안화를 절상한다고 해도, 나머지 100여 개 국가와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무역적자가 해결되지 않는다. 미국이 중국에 적대적 스탠스를 취하지 않는다고 해도, 폐쇄적인 금융시장과 정부 주도의 감시 통제 체제가 초래하는 비효율성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국 리더들이 경제적 논리보다 정치공학을 앞세움으로써, 결국 경제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환율 상승으로 한 나라의 수출품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 경쟁국의 수출품 가격 경쟁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또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그 나라의 통화로 표시된 채권 등 자산을 보유한 국가는 그 자산 가치가 그만큼 하락하는 환차손을 감수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양적완화는 이웃 나라를 가난하게 만드는 '근린궁핍화정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정필모 著 『달러의 역설』, 21세기북스, p.37)
선진국들은 2008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실물경제가 부진을 털어내지 못하고 디플레이션으로 빠져들어갈 조짐을 보이자, 앞다투어 화폐 증발에 나선 바 있다. 일찌감치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을 경험한 일본이 먼저 꺼내들었던 무제한 화폐 증발 카드는, 본래 그 유효성이 의심되는 도구였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는 언제 어느 정도의 인플레이션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있음에도 모든 선진 경제권이 그 카드를 쓰고 있었다.
경제학적으로 정석인 방법을 따른다면, 정부는 경기침체일 때도 개입을 자제하고 실물경제와 금융경제가 비용 구조를 조정하여 스스로 상승 동력을 되찾는 과정을 돕는 제한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디플레이션이 오면 걷잡을 수 없다는 두려움과, 눈앞의 경제를 어떻게든 부양해 다음 선거에서 득을 봐야 한다는 심리가 혼합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세계 경제가 정치 논리에 의해 갈수록 뒤틀려 갔다.
경제 성장 동력이 식으며, 화폐 증발 그리고 정부의 지출 증대가 없으면 언제든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공포가 만연했다. 갈수록 줄어드는 세계 경제 성장의 파이 앞에서 각국이 내린 결정이 비슷해졌다. 상대 진영을 설득해 다음 세대의 발전을 위해 구조적인 개혁을 하는 것보다, 화폐를 더 찍어 타국의 파이를 뺏고 정부가 돈을 더 써서 소비를 부양하는 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모두가 제 살 깎아먹기 경쟁에 몰두한 셈이다.
채무에는 피의 대가가 따른다. 만약 채무가 미래 형세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세계의 구조와 발전 방향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채무위기 덕분에 경제게임의 마지노선이 모두 밑으로 떨어졌다. 이는 채무위기가 지닌 특성이라 하겠다. 유럽과 미국의 채무위기를 살펴보면 두 지역은 채무위기를 걸고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한빙 著 『미국, 유럽, 중국의 화폐전쟁』, 평단, p.30~31)
자국 이기주의와 정치 논리에 포섭된 경제학은 과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각국에서 타국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 고양되면서 정치인들이 더 결속력 있는 지지 기반을 갖게 되었고, 제로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물가상승률은 2010년대 후반에 2% 근처로 올라왔다. 그동안 중앙은행이 시장에 뿌린 돈이 실물경제보다 금융경제에 더 빨리 스며들어 경기와 자산시장의 온도 차가 있었지만, 어쨌든 상황은 개선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각국 수장들이 본질적인 경제 문제를 덮어두고 눈앞의 정치 과제에만 급급한 대가는 컸다. 양적완화는 부채의 화폐화에 불과한 것으로,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그 돈을 회수해야 했다. 그러나 대규모 유동성을 회수하는 것은 기껏 살려 놓은 경제의 활력을 위축시키는 것과 같았고, 그것은 정치인들에게 자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정상화에 손을 대지 않는 사이 시장의 유동성은 과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쟁 같은 10년을 보내고 2020년대의 여명기에서 각국은 서로가 짊어진 시한폭탄을 보게 되었다. 미국은 막대한 규모의 '쌍둥이 적자'를, 중국은 거품 낀 부동산 시장을, EU와 일본은 천문학적 규모의 유동성 투입에도 활성화하지 않는 실물경제를 안고 있었다. 얼키고설킨 이해관계를 풀 실마리와 유동성을 회수할 출구전략을 모두 찾아내야 하는 초고난도 미션을 짊어진 채로, 세계 경제는 2020년을 향해 불안한 첫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