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루 May 02. 2022

경제의 딜레마와 쪼개지는 세계

자원이 각성시킨 각국 내면의 이기성


  방을 얻어 살고 있는 여느 대학생처럼, TV를 본 지가 제법 오래되어 최근 밤 9시 뉴스에 어떤 헤드라인이 장식되어 있을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제목 중 치솟는 물가에 대한 우려가 반드시 섞여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최대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이 가장 심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전년 대비 물가상승률이 3~5%를 오가면서 모두가 계산대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계산대 앞에만 서면 손이 떨리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작년 이맘때쯤만 하더라도 물가로 인해 이렇게까지 쩔쩔맨 적이 없다는 것으로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원자재 가격 급등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단락되면 물가가 안정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세계 경제는 이미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조기에 탈출할 수 있는 선택지를 이미 대부분 잃어버린 상황이다. 각국은 현 상황에 마주해 철저히 자국 이기주의와 각자도생을 위한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총성 없는 전쟁에 뛰어든 와중에, 각국의 소비자들은 물가 상승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 아비규환의 판도의 중심에는 바로 자원이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노골적으로 견제하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2021년 6월, 미국은 반도체와 배터리·의약품·희토류 등 4개 품목에 대해 자국 공급망 분석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보고서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전 세계 제조·물류의 공급 사슬에서 중국의 힘을 빼고 미국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김연규 著 『가난한 미국 부유한 중국』, 라의눈, p.427)


  사태의 시작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21세기 들어 초강대국 수준을 넘볼 정도로 성장한 중국을 찍어 눌러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할 필요가 생겼다. 트럼프 정권은 막대한 대중 무역 적자를 감축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의 산업 성장 동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핵심 기업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를 누르고 집권한 조 바이든 역시 강경한 대중 외교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자국의 제조업 공급망 확충을 위해 리쇼어링 정책을 일관적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전략 산업으로 지정한 자동차 및 반도체 등에 대해 전폭적인 정부 지원을 아끼지 않는 태세다. 미국이 막대한 규모의 재정 적자에도 이례적인 수준의 경기부양책을 준비한 것 또한, 중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미국은 호주와 EU를 전략적 동반자로 설정하고, '권위주의 중국 진영과 자유민주주의 미국 진영'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여 중국과의 장기전을 준비해 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중국의 독선적인 대외 정책을 계기로 반중 정서가 커진 유럽 국가들도 미국에 기꺼이 동조했다. 그들은 제조업에서의 중국의 장악력을 억제하고, 진영 내에서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탄소중립이라는 공동의 대의를 지키면서 말이다.



희소금속은 매장량이 적은데 그나마도 몇몇 국가에 편중되어 있다. 희소금속 부자 나라는 5개로 중국, 캐나다, 러시아, 호주, 미국이다. 이들이 전체 매장량의 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모두 땅덩어리가 큰 나라들이다. … 특히 중국에 편중된 금속들이 많다. 당연하게도 자원의 편재성이 클수록 공급 불안정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위의 책, p.145)


  하지만 서구 진영은 시작하자마자 거대한 벽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자신들이 30년 전부터 줄기차게 주장했던 시장 자유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질서는,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 잡은 세상을 만들었다. 서구가 탈공업화로 산업 고도화를 이루고 중국은 2차 산업을 발달시켜 성장하는 '윈윈' 시스템에 만족한 나머지, 서구 국가들은 중국 제조업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나 커져버렸음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중국에 의존하는 공급망의 리스크를 깨달은 국가들이 공급망 내재화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었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그들은 자원의 조달마저도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재료를 가공하는 기본적인 설비와 기술마저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보다 넓은 영토를 가진 미국은 많은 양의 희소자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의 채굴과 가공에 대한 기반이 미비한 것은 마찬가지다.


  자국에 광물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탐사하고 개발하는 데는 몇 년이 소요되며, 공장 설비도 계획이 있고 돈이 있다고 해서 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세계의 공장 노릇을 해왔으며 드넓은 영토에 수많은 자원을 보유한 중국은 조용히 자원 채굴-가공-제품화 체계를 내재화하고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전쟁에 돌입한 중국과 달리, 서방은 기초 장비도 부실한 채로 전장에 뒤늦게 뛰어들어야 하는 셈이다.



2017년 네이처지에 실린 한 논문은 저탄소 사회로의 전환이 막대한 양의 금속과 광물을 필요로 하는 변화임을 강조하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기후변화가 역설적으로 전 세계적인 광산 개발 붐을 가져오고 이로 인한 또 다른 환경 폐해가 늘어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위의 책, p.347)


  미국이 영토 내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희토류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미국의 우방인 호주도 풍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철광석과 희토류가 있다. 문제는 중국이 세계 매장량의 대부분을 점유하는 특정 광물들 중 전략자산으로 활용될 만한 것들이 존재하며, 서방 국가들은 광물을 가공할 설비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또한, 환경규제의 높은 문턱으로 인해 설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량생산을 개시하기에 제약 요소가 많다.


  중국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급망 확보를 위해 미국, 캐나다, 호주가 자원 개발에 발 벗고 나서면 그만큼 환경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친환경 경제로의 진화를 꿈꾸는 각국의 기본적인 발전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산업 구조와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생산 역량을 늘리면 유해 물질의 배출량도 필연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장기적으로 손해를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가치는 때로 크게 할인되고는 한다

  대의명분과 실리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각국은 후자의 논리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미래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모두가 지금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탄소중립보다 자국의 패권 유지를 우선할 것이며, EU 역시 자동차 산업의 부활과 난방용 에너지 공급이 우선순위에 있다. 상대가 전투 준비를 갖추기 전에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역은 경제 부흥으로 이어지고, 경제 부흥은 경제 잉여의 누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경제 잉여는 국방비 및 연구개발비의 증대로 연결된다. 하지만 두 경쟁 국가가 상대이득만 고려할 경우에는 협력의 여지가 없는 제로섬 게임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 두 국가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협력을 거부하기 때문에 최선의 경제적 결과를 얻지 못한다.
(마르코 파픽 著『지정학적 알파』, 여의도책방, p.187)


  세계경제가 세계화 이후 누렸던 성장기를 뒤로 하고, 저성장 시대에서 제로섬 게임이 되어버린 경제전쟁에 돌입했다. 우리는 모두가 단기적·중기적 이익을 장기적 이익보다 우선시하게 된 아수라장을 목격하고 있다. 양 진영의 거두인 미국과 중국이 현 상황에 대한 최적해를 모를 리가 없다. 상호 양보로 지정학적 리스크를 줄이고, 러시아를 압박해 전쟁 국면을 진정시켜 불안의 끝을 달리고 있는 공급망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각국에는 세계 평화와 글로벌 GDP 합계의 극대화보다 자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극대화가 중요하며,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 대항하기 위해서 자원 확보와 기술 개발, M&A 공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결정이 모여 글로벌 제조업의 산출량 저하와 비용 인상 요인으로 작용하여, 소비자로서의 우리를 갈수록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이미 서방은 이익을 앞세워 사상적인 딜레마의 불편함을 벗어던진 바 있다. 오늘날 굴지의 IT 기업들을 거느린 미국과 세계의 공장을 품은 중국의 탄생은 서방이 주도한 세계의 자유시장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야심이 느껴지자, 미국과 유럽은 손을 맞잡고 글로벌 자유시장 질서를 허물며 그들이 주창한 세계화의 막을 내렸다. 다시 찾아온 딜레마 앞에서도 그들은 동일한 패턴의 선택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각국의 생존본능에서 비롯한 이기심이 인간 사회의 장기적인 이득에 부합하는 논리 앞에 서 있다. 자원을 둘러싼 다툼과 이해관계에 따라 쪼개진 진영 논리는 지리멸렬하게 이어질수록 모두에게 장기적으로 더 큰 데미지를 안길 것이다. 인간이 훌륭한 문명을 일굴 만큼 현명하지만, 동시에 그 현명함만큼이나 거대한 어리석음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복되는 역사의 패턴을 통해서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전 05화 자국 이기주의와 정치경제학의 포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