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싶은 삶은?
“지호야 잠깐만 엄마 일해야 해”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나는 서서히 주문량이 많아졌다. 동시에 아이 얼굴 보다 컴퓨터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늘어 갔다. 아이 어린이집 갈 시간에 돈을 벌고 싶어서 시작한 일어였는데 하나라도 빨리 보내 드리려 하다 보니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었다.
제작 스티커 판매로 버는 수입이 간식값에서 아르바이트비 정도가 되었다. 집에서 하는 너무 작고 사소한 부업.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지만 돈 보다 이 과정에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인 거 같은 느낌에 위안을 얻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4년 동안 아이 엄마라는 정체성에서 살았는데 새로운 일을 하니 새로운 정체성이 생겼다. 사람들은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장님으로 부르기도 했다. 종종 낯선 이의 언니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다양한 호칭으로 불러지는 게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하는 사업이긴 했지만 파이가 작은 일이었다. 작은 부담도 감당할 그릇이 되지 못한 나. 러시아 인형인 마트로시카처럼 작은 사업 중에 더 작고 더 작고 작은 일이었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일만 해오며 살던 나에게 적합한 일. 그렇지만 작은 일에 비해 내가 느끼는 바는 컸다. 돈 외에 부수적인 마음들이 한 켭 한 겹 쌓이고 있었다. 나만의 일. 과정을 겪으며 오는 작은 성취. 그로 인해 생기는 책임감. 책임을 해내가면서 오는 자기 효능감 등등.
딸에서 어머니가 되는 이야기가 담긴 많은 책들을 보다 보면 임신-출산-육아휴직 혹은 퇴사 이 과정에서 엄마가 되면서 포기해야 할 것들 중 하나로 자신의 커리어가 적힌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그 부분을 고통스러워한다. 나 또한 아이 엄마였지만 그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다른 세상을 엿보곤 했다. 나는 출산으로 인한 된 퇴사가 좋았다. 출산이라는 이유로 좋아하지도 않는 일로 돈을 위해 들어간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다.
퇴사 후 육아를 하며 ‘나는 어떤 양육자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출산 후 퇴사 당시를 무수히 많이 떠올렸다. 내가 학벌이 좋았다면, 그래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면, 학벌이 좋지 않았어도 20대 때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았다면 출산 당시 육아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웠을까?
결혼과 출산 후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 때로는 위안을 그 위안의 배로 내 지나온 인생에 대한 초라함을 주었다. 아이 엄마가 된 나는 내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것을 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해 나가면서 좀 더 큰 시야로 삶을 살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거울처럼 나에게 비추어졌다.
허나 내가 좋아하는 일은커녕 하고 싶은 일을 잘 모르겠는데 내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 들 힘이 생길까. 내가 걸어오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아이에게 말만 하며 투영시키고 싶진 않았다.
아이의 삶을 그리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의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데로 살던 나에서 시간을 잘 써보고 싶은 나로 재양육 되고 있었다.
위안과 초라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해나간 작고 소중한 나만의 일은 부업은 그 이상의 의미를 주었다. 시간이 가는 대로가 아닌 내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