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질은 단절되지 않으니까
상급병원과 심평원을 거치며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경력을 쌓고 인정을 받으며 보상이라는 결과물로 나를 증명하던 시간들. 하지만 결혼과 세 번의 출산은 내 이력서에 '5년'이라는 긴 공백을 남겼다.
다시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 마주한 건강보험공단의 면접장. "인간관계의 갈등 해결 경험"을 묻는 질문에 나는 자연스레 최근 5년간 내 세계의 전부였던 학부모 관계를 떠올렸다. 그러나 면접관의 반응은 냉담했다. "육아 관련 이야기는 지양해 주세요."
그 한마디에 지난 5년, 내가 쏟았던 눈물겨운 노력과 성장은 갈 곳을 잃었다. 사회는 여전히 아이와 씨름한 시간을 '경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지원자들은 최신 버전의 민원 해결 사례와 조교 활동 경험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5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야 하는 나에게 인생 처음으로 맛본 굴욕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 묘한 오기가 생겼다.
'여기까지 왔는데, 잘 보이려 애쓰기보다 진짜 내 모습이나 보여주고 가자. 5년 전의 나는 충분히 괜찮은 직장인이었으니까.'
나는 마음을 비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지난 5년 동안 육아에 전념했습니다. 이 전형이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자리인 만큼, 최근의 경험을 말씀드리면 육아 이야기가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조금 오래전 일이지만, 제가 조직에서 겪었던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나의 상황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면접장을 나오자마자 신랑에게 전화해 "나 망한 것 같아"라고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근처 식당에 들어가 라면 한 그릇을 후루룩 들이켰다. 며칠 뒤에 나올 결과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했다는 사실이 그 어떤 성찬보다 개운한 해방감을 주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망했다'고 생각했던 그 솔직함이, 어쩌면 면접관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진심으로 닿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공공기관에서 경력단절 여성을 위해 배려해 준 4시간의 단시간 근로.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처럼 보였다.
하지만 복직 후 마주한 현실은 또 다른 벽이었다. 짧은 근무 시간만큼 배정되는 업무의 범위는 한정적이었고, 20대의 속도와 40대의 노련함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비슷한 궤도를 돌았다. 휴직과 복직을 거치며 변화를 기대했지만, 돌아온 자리엔 여전히 똑같은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편안함'과 '안정성'을 놓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만 주구장창 반복해야 하는 업무의 한계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내가 꿈꿨던 일하는 삶은 단순히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고 나라는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다시 사직을 선택했다. 누군가에게는 무모해 보일지 모를 이 결정은, 사실 나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존중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에너지를 소모적인 반복에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더 가치 있는 변화를 찾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박완서 작가는 저서 <나의 만년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됨으로써 자기 성장을 멈출 게 아니라, 자기가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지적인 탐구를 계속하고 능력을 개발하여 자기 능력에 맞는 일을 발견할 일이다."
나는 이제 그 '능력에 맞는 일'을 다시 찾아 나선다. 직책이나 숫자가 주는 안정감 대신, 내가 주체가 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만의 길을 고민하는 수많은 '나'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만년필을 쥐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중이라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이제 내 퇴사 선언에 '이번엔 몇 년 버텼지?'라며 날짜부터 체크한다. 누군가는 인내심 부족이라 하겠지만, 나는 이것을 끊임없는 '자기 갱신'이라 부르기로 했다. 글쎄, 쓰고 보니 이쯤 되면 거의 정신승리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박완서 작가의 만년필처럼, 내 삶의 잉크가 마르지 않게 부지런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볼 생각이다. 지루할 틈 없는 나의 다음 직업은 무엇이 될까. 일단 오늘은 퇴사 기념으로 맛있는 저녁 메뉴부터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