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2023, 레제, <너무나 많은 여름이>

by 진다르크

오늘 들어온 책들을 둘러본다. 마땅히 끌리는 책이 없어서 앞에 앉아있는 여자 사서에게 묻는다.

"소설 부분은 어디 있어요?"

"800번대로 가세요."

외국소설의 분야는 딱히 나의 정서에 맞지 않아서 지나친다. 그리고 열람실도 지나치려던 찰나 슬쩍 안을 들여다본다. 평일인데도 자리가 꽤 채워져있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동기부여가 된다. 몇 년 전, 나태해질 때마다 부러 노량진역을 종종 갔었다. 식당에서도 책을 펼치며 공부하는 사람들.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 또한 자격증 준비나 시험 등 무언가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 거겠지. 그게 무엇이 되었던 좋은 결과가 있기를.

코너 마지막 정중앙 소설책들이 세로로 진열되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 내게 흥미를 끄는 이야기들을 훑어보다 김연수라는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손에 집은 후 책을 훑어보았다. 김연수는 말해 뭐해. 무조건 읽어야지. 처음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는 내내 나는 감탄했다. 그리고 단언했다. 아, 이 사람은 천재다. 김연수의 글은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글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스스럼없이 글로 담아낸다. 글자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 문장들을 다 음미하고 싶다. 간직하고 싶은 구절들이 계속 생겨난다. 김연수의 글은 내가 갈 수 없는 길이다. 그의 글을, 생각을, 너무나도 닮고 싶다. 그의 책을 덮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치 무언가를 잃은 느낌,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슬픔, 그러나 그 끝은 따스하고 매우 섬세하다. 그는 문학상을 여러 번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소설가로써 재능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천재들조차도 이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러면 고작 시작한 지 1년밖에 안된 내가, 작문 실력이 안는다고 투덜거리는 내가, 돈도 안되는 글을 뭐 하러 쓰고 있냐고, 독자 없는 소설가는 외롭다는 생각을, 나의 글이 볼품없게 느껴져 주눅이 들었던, 성과는 없고 시간만 잡아먹는 고달픈 작문의 과정들이, 끝도 없는 퇴고의 과정들이, 이 모든 것들이 숙연해졌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더 사랑하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삶을 이루어라. 꿈꾸는 그 모든 것들이 빛이 되기를.

나는 김연수의 글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독서회에 참여해 김연수와 인사를 나누고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닮고 싶다.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비록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지만, 제 뒤에 오는 사람들은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말입니다.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노인은 괜찮다고 말했 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거든. 휴게실의 불을 끄고 나와 호텔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 동트기 전의 캄캄한 새벽이었지.

생각보다 바람이 차가워서 깜짝 놀랐어.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추웠지만 나는 좀 더 서 있었어. 거기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호수의 물결이라면 어떨까 싶더라. 그래서 호텔 앞 호수의 풀숲 너머로 청둥 오리떼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른다면. 그 광경을 보고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저게 청둥오리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둘만의 식사 뒤에 밤이 찾아온다면."

"그렇다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따뜻한 밤이겠네."

"모르긴 해도.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꿈속에서 그는 삼십 대 중반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어떤 섬광이 번쩍이면서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에게서 어떤 이야기들을 듣게 되는지, 둘은 어떤 도시를 가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풍경을 보게 되는지, 어떻게 그녀를 처음 안게 되는지, 둘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지, 얼마나 사랑하게 되는지, 그러는 동안 둘이서 함께 몇 개의 강을 건너고 몇 그루의 벚나무를 바라보며, 얼마나 뜨거운 여름들을 보내게 돼

는지......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꿈속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라고 그녀에게 물었다고 이진혁씨는 우리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꿈속에서 그녀가 "지금 우리는 이미 살았던 인생을 다 시 한 번 살고 있는 중이거든"이라고 대답했다고 그는 말했다.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고말고요. 소설가의 재능이란 꿈꾸는 것이 전부다. 꿈꾸는 능력은

꿈을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꿈같은 현실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이 선물에 나는 지금까지도 만족하고 있다.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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