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도
지나가는 중일까?
이따금 누구도 탓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리석었구나'하는 쓰라림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 거지 같은 쓰디쓴 아픔의 근원은 어디일까.
허무하지도, 잘한 것도 아닌 감정이 먹구름처럼 나를 짓눌렀다.
그러다, 나는 그곳에 정착해 버렸다.
그곳의 이름은 '무력함'.
나를 지키기 위해 도망쳐 들어간 곳.
의지할 곳이 없을 때면 나는 무력함이란 공간에 취해버린다.
나는 유하나이다.
무력함을 강하게 느낄 시기에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이 슬퍼 보였다. 일상의 모든 것이 흑백 같았고, 옷을 고르는 일이나 어떤 음료를 마실지 고민하는 일 같이 조그마한 결정조차도 버거웠다. 힘든 일은 같이 온다는 전통적인 말처럼 조그마한 결정조차 버거울 때 나를 기쁘게 하던 사람들도 하나씩 나를 떠났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전보다는 지쳤고, 조금 단조로워 보일뿐 일상을 견뎌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해낼 테니까. 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해낼 것이다.
근데 정확하게 무엇을? 난 무엇을 해내왔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내가 해낸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싶은 쓰나미 같은 짙은 슬픔의 파도는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쓰나미를 피할 힘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떠다니는 나무라도 타고 싶었다.
나는 구해줄 뗏목을 기다리며, 기꺼이 슬프기로 했다.
슬퍼지면, 아주 심연 속으로 슬퍼지면 슬픔 속에 조용하게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못된 생각을 했다.
하나는 하나만 생각했나 보다.
하나에 둘이 더해지면 무서운지도 모르고.
슬픔은 전염이 되는 것처럼 내가 슬플 때 나의 주변은 더 슬퍼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기대고 싶었는데. 돌아온 건 더 큰 슬픔이었다.
해결해 달라는 눈빛만, 내가 힘들다는 이유를 증명해야 할 눈빛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래야만 했다.
여유가 없는 와중에 그들의 비슷한 서러운 일들을 듣는 나, 내 아픔을 참고 그들의 아픔을 걱정하는 나, 내 슬픔보다 그들의 아픔이 더 크다고 여기는 나, 나의 아픔은 그들이 괜찮아지면 돌보겠다는 나.
이 모든 나는 나를 무력함이란 집으로 이끌었다.
무력함이란 집은 생각보다 더 아늑하고 조용하다. 밖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차분한 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상처 주는 말도, 슬펐다는 일도, 위로를 원하는 아픔의 언어들도 모두 잊고 그들의 슬픔에 이미 슬픈 내가 더 슬퍼지지 않게 도와준다. 무력함이 없었다면 나는 무너질 것 같았다. 무너지면 모두가 쓰나미에 죽을 것 같은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치던 때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더 슬픈 때였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감정의 쓰나미는 무력함이란 나만의 울타리에서 버티다 보니 신기하게도 어찌어찌 버텨냈다.
하지만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는 꽤나 처참했다. 공감을 하던 말들은 허공 속에 묻혔고 정작 앞으로 해야 할 공감능력을 잃어버렸다. 감정이 무던해진 것이 아니라 심장이 뛰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게 착각일까 싶다가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들이 미웠다.
큰 일을 겪으면 평범한 하루로 돌아갔을 때 순간 더 아프다.
억울한 마음과 안도의 마음이 교차할 때 나는 무력함 속에 숨은 나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고생했어 하나야.'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다들 너무 지쳐서 그 말을 건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무력함에 숨은 나에게 속삭여주기로 했다.
'하나야, 뗏목 기다리지 마. 안 와.'
그래도,
'네가 뗏목 찾을 거야 꼭.'
'괜찮아져, 정말로.'
재난 이후 나는 회복하기 위해 외치기 시작했다.
'고생했어 하나야. 너무 고생 많았어.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거야! 기특해.'
감정의 쓰나미가 무서운 이유는 주변이 다 같이 감당하느라 지나간 후에는 기억이 없어진다.
꺼내는 것조차 미안하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알고 있으니까.
너무 슬프면 기억이 없어진다. 떠올리기 싫으니까.
쓰라린 무력함을 느끼게 해 준 감정의 쓰나미는 재난문자 하나 없이 시작된 재난이었다.
상처투성이들이 가득하면 내가 어리석을 만큼 내 감정을 무시해도 그것이 최선임을 알게 된다.
분명하게 느낀 건 그들이 '나보다 더 슬퍼 보였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것이 나를 더 아프게 했지만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찝찝한 건 이것이 그렇게 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도 꽤나 슬펐으니까.
오지랖을 부리기에는 내가 너무 슬펐다.
어쩔 수 없는 쓰나미에 '무력함'은 집이 아니라 도피처다.
이 재난을 통해 뗏목을 찾고 뗏목을 끌고 갈 사람은 나 하나뿐이란 걸 깨달았지만
무력함에 잠겨버리면 허울뿐인 영웅만 남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아직도 나는 부담스러운 일이 생길 때면 무력함에 기댄다.
나쁜 습관이지만 슬픔을 잠시나마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것은 오지라퍼인 나에게 본능적인 일이다.
유독 그날의 무력함에게 정말로 고마웠다고 말해두고 싶다.
'내가 무너지지 않게 공간을 내어줘서 고맙다고'
나는 앞으로도 의지할 곳이 없을 때면
잠시 슬픔의 오두막에게 들릴 테지만, 안다.
유하나가 머무르는 시간은 유한하다는 걸.
그렇게 이겨내다 보면 재난은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또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