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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이 빛나는 밤에 Nov 17. 2023

힘듦을 참고 견디면 얻는 것들!

아들아 ~ 삶은 그냥 던져주지 않는다.


'미친 새끼"

도대체 끈기라고 있기나 해"


입이 바싹 타 들어가고 후끈거리는 얼굴을 뒤로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5킬로 완주하고 기쁜의 세라 머니를 누리기도 전에 아들의 행동에 꽉 붙들었던 자존감이 무너져 내렸다.


"아들아 어디야'

나 집에 왔어?"


무슨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지? 욕 한 바가지를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화를 자제하고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었다.


따라 나오지나 말지? 자기 의지로 밖으로 향했으면 호수 한 바퀴라도 돌 요량이지 그새 집에 와 있는 아들이 꼴 보기 싫었다. 그런 썩어 빠진 정신으로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겠다고 아우성이는 지?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속만 섞어 뭉그러졌다.


딱 한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리고 올게" 일종의 알림 서비스였다.


"엄마 나랑 함께 가자" 아들의 목소리였다.

기다렸다가 아들과 함께 차가워진 호수 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에는 비장한 각오로 함께 달려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아들은 먼 발자취에서 보이지 않았다.

평상시와 똑같이 아들의 행동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오로지 내 목표로 줄 행랑을 치며 무작정 달렸다. 썰렁한 호수 공원에는 적막한 공기와 매섭게 불어 재낀 바람이 지친 뇌를 자극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내 일상에 집중 못 하는 나에게 한마디 외침을 던졌다.


"그냥 너의 인생을 살아"


힘듦과 고통은 아들의 몫이야"


인생은 각자 주어진 달란트와 고통의 크기가 있는 거야.


적당히 쓰러지고 무너지고 밟히고 상처도 입어야 다시 일어나는 힘이 생기는 거야"


차가운 바람이 던지는 외마디가 속상했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밖으로 달릴까? 말까? 을 고민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5킬로를 완주하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자신감을 되찾아줘서 고마웠다.

잠깐의 행복은 짜릿한 쾌감과 도파민을 자극했다.


어디쯤 오는지 아들에게 전화를 한순간 기분은 다시 지하실 바닥으로 추락했다.

벌써 집에 도착했다는 아들의 한마디에 쌍욕 한 바가지를 자연 속에 마구 쏟아냈다.


"거지 같은 새끼"


도대체 목표나 끈기는 있기나 하는 거야'


뭣 하라 따라 나와서는 금세 집이라는 거야"


적어도 호수 한 바뀌는 돌다 가야지"


너무 쉽게 포기하는 아들의 행동에 올려놓아던 자존감이 다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냥 내 인생만 생각하고 싶은데 엄마라는 이유로 아들의 인생에 내 인생을 대입시키는 게 문제였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딱 한 구절이 생각났다


"타자 분리"


나랑 아들을 분리시켰어야 했다.

아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줘야 했다.

아들의 인생은 그냥 자기가 알아서 살게 내버려야 했다.

내 마음속에는 나약하고 연약하고 힘듦을 견딜 줄 모르는 아들 행동이 꼴 보기 싫었다.

험난한 인생을 어떻게 살라고 그런 건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인내와 끈기와 성취감을 맛보길 바랐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가끔씩 5킬로를 달리려 나왔을 때 아들과 함께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마음껏 혼자 달리는 게 심적으로 평온하고 신경 쓸 게 없었다.

그냥 자연 벗 삼아 적당히 힘듦을 견디며 달리는 게 기뻤던 나였다.

아들과 함께 나왔을 때는 겨우 1킬로도 못 달리고 뒤로 처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 자체가 걸리적거리고 싫었다. 어떤 마음으로 따라 나오는지? 젊은 패기와 배짱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을 연출했지만 그래도 호수 한 바퀴는 꾸역꾸역 걷고 오는 날의 연속이었다.


매서운 추위 때문인지 아들은 쉽게 포기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아들 얼굴에 '화' 한 바꾸니 쏟아내고 싶지만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그 조차 허락지 않았다.

이번에도 빙그레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내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게 최상의 방법이었다.


삶에게 묻고 싶다.

쓰러지고 방황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대처해야 현명한 부모인지?

떠도는 허공 속에  답을 묻고 싶다.


믿어주는 부모,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부모,

"괜찮다, 잘했다" 칭찬해 주는 부모


어디까지가 경계인지 신이 있다면 나에게 지혜로운 처방전을 선물해 줬으면 좋겠다.


"시린 바람에도 섞어 버린 내 영혼은 자식을 위한 사랑이라고 합리화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래의 구절을 마음속에 새기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에 대처해야 할지 아직 어리숙하고 미숙한 부모였다.

돈 주고 정답지를 살 수 있다면, 방정식이라도 구하고 답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신은 그냥 지혜와 깨달음을 그냥 주지 않은 잔인한 놈이었다.

부대끼고, 쓰러지면서 터득하라는 신의 계시였다.

오늘도 풀리지 않은 숙제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좋은 부모란 아이의 필요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충족시켜 주는 부모가 아니다. 사람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의 결핍과 좌절을 경험해야 한다. 결핍되고 상실한 것을 스스로 찾아 매우려는 노력이 바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 주면 아이는 성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좌절을 주면 아닌 서서히 좌절을 견디는 법을 배워 나가고 현실감을 얻게 되며,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 합리화에 철저히 빠진 날이었다. 엄마는 오늘도 속이 썩어 뭉그러진다.


할까? 말까?

그냥 하는 거였다. 달리고 나니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이 올라갔다.

성취감과 뿌듯함도 한 몫했다.

귀찮지만 밖으로 나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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