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생일은 꼭 휴가 기간에 찾아온다. 하필이면 이번 생일은 주말을 제외한 휴가 마지막 날. 어제 지인이 선물해준 케이크로 미리 아이와 생일 축하를 했던 터라 아침은 조용히 넘어갔다. 특히나 미역국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굳이 미역국이 차려진 상이 필요하지 않다. 스포츠 클럽에 가는 아이를 위해 계란, 쇠고기 초밥을 급히 만들고 아내를 위해 간단히 토스트를 만들었다.
아침으로 준비한 간단한 음식들
아이를 보낸 오전 아내는 오후 수업 준비를 난 모처럼 휴가 루틴인 독서를 했다. 줄다가 읽다가 졸다가 읽다가.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배는 딱히 고프지 않았고 어디 가까운 레스토랑이라도 가야 하나, 간단한 중식 코스라도 먹어야 하나, 베트남 요리라도, 하는 찰나에 오후 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파스타를 만들어 줄까, 우동을 만들어 줄까, 라면을 끓여 먹을까 하다 결국 오후 1시가 되었고 도시락을 먹자로 결론지었다.
집 앞 가게에서 산 5900원짜리 도시락을 사들고 털래털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함께 급히 먹은 후 아내는 수업을 하러 집을 나섰다. 아내를 보내고서야 아내의 생일에 아침 미역국도 없이 선물도 하나 없이 점심에 도시락을 저녁엔 공연 약속이 있어 나 혼자 외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건 실화다! 이쯤 되면 오늘 밤 아내의 따가운 시선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조마조마할 법 하지만 새삼 침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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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날의 사치를 즐기지 않는다.
아내나 나나 우린 둘 다 특별한 날을 기억은 하되 그 특별한 날에 특별한 사치를 즐기진 않는다. 이런 날이구나 그래서 좋은 날, 축하할 날로 기억할 뿐 이런 날이니까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 하고 사야 하고 먹어야 한다는 공식을 두지 않는다. 작년 내 생일엔 내가 꼭 사고 싶었던 비싸지 않은 작품 하나와 소액의 가상화폐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아내가 허락했다.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일임했다.
나의 모든 지출은 아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일임했고 심지어 공인인증서조차 아내가 관리한다. 비상금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겐 없는 셈이다. 그게 가능하냐고들 하지만 가능하다. 지출에 있어 사소한 금액이라도 모두 아내와 상의하고 서로의 공감 하에 집행한다. 그래서 돈에 있어서 어떠한 오해도 뒤탈이 없다.
꼭 필요한 곳엔 가치 있는 소비를.
명품 가방보다는 아이의 학원 하나를 더 고민한다. 자동차도 탈 수 있을 때까지 타자며 어제 고장 난 차를 견인해 수리센터에 맡겼다. 하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에 있어서는 조금은 더 관대 해지는 우리다. 여느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먹는 데 있어서는 꼭 좋은 재료여야 하고 자기 계발을 위한 투자, 건강을 위한 가치 있는 지출에 있어서는 과감하다. 물론 가치 있는 소비에 대한 신념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배려
술보다는 사람을 좋아해 모임이 잦은 나와는 다르게 아내는 술을 먹지 않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그다지 취미가 없다. 특히 회사 회식이 많았던 신혼 초기 아내는 집들이에 쌓인 소주병을 보고 기겁을 할뻔했다. 술을 권하는 동료에 화들짝 뒤로 물러서며 경악했던 아내가 추억처럼 박제되어있다. 난 요즘 술자리가 모임이 많이 줄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이와 거리를 점점 좁혀가는 게 결혼 생활이고 1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린 신혼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글을 쓰다 보니 생일을 맞은 아내와의 5900원짜리 도시락에 대한 반성문 같지만, 면죄부를 위한 진술서 같지만, 오늘 저녁 외출에 대한 방어막 같지만 난 여전히 행복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수업 중에 브런치 알림을 받게 될 아내, 뭘 이런 걸 다 글을 쓰냐고 하겠지만 꼭 기록하고 싶었던 아내의 마흔세 번째 생일날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