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소설
나에게는 감사하게도 딸이 두 명이나 있다. 게다가 둘 다 좀 착하다. 첫째는 다소 냉정한 편이긴 하지만 속정이 깊고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둘째는 그냥 대놓고 착하다. 감성이 다소 과하게 넘쳐나서 이 험한 세상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가끔 들기는 하지만, 정이 많고 늘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고민 아닌 고민이 한 가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로 두 딸과의 '대화'에 관한 것이다. 감사하게도 나의 가족들은 비교적 대화가 활발한 편이다. 서로 감정이 상할 때도 있고 심지어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지만, 그래도 대화는 비교적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나의 대화의 기술이 다소 형편없다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두고 정리하고 분석하고 추론하여 글로 이끌어 내는데 익숙한지라, 내 대화법은 부드러운 유연함이나 자연스러운 유머와는 다소 거리가 있고 살짝 진부하다. 너무 진지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심히 부러웠는데, 물론 예전보다는 훨씬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나의 대화의 기술은 많이 부족한 편이다.
그렇다 보니 훌쩍 커버려 두 딸과의 대화는 늘 뭔가 아쉬움을 남긴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차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어느덧 아이들의 대화 기술은 이미 나를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게다가 대화의 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내 생각이 정리되고 내 입을 통하여 말이 튀어나올 즘이면, 이미 아이들의 대화는 저만치 달아나 있다. 아내도 곧잘 대화를 따라가지만 유독 나는 저만치 뒤처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오랜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말발이 뒤처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오해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두 딸의 대화를 애써 따라가다 보면, 세대 간의 대화법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일반화해서 전부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성세대는 아무래도 경험과 연륜이 많이 쌓이다 보니 대화가 길어지고 무거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화의 상대가 대부분 자신보다 어리다 보니 자칫하면 자기도 모르게 진심 어린 훈계를 넘어서 꼰대스러운 말투로 바뀌곤 한다. 그에 반해 젊은 세대들의 대화법은 상대적으로 솔직하고 거침없지만 기성세대가 느끼기에는 다소 즉흥적이고 깊이가 얕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어느 시대나 어느 세대 간에 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관통하여 우려로 다가오는 부분은 '대화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화 사회로 접어든 지는 이미 오래이고, SNS나 메신저 같은 디지털 문화를 넘어서, 최근 들어 다양한 AI 활용기술의 발달과 대중화 현상이 우리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소통의 형태를 변화시키다 보니, 사람 사이의 대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대화라는 것은 사실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반드시 필요하지만 부족해서도 안되고 과해서도 안되며, 서로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수고로운 작업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내향적 성향의 사람들은 대부분 대화를 어려워한다. 하지만 많은 말이나 일방적인 소통이 아닌 진정성 어린 대화는 사회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필수 요소일 것이다.
일전에 한 언론사의 지면을 통해 아래와 같은 기사를 접한 적이 있는데, '느슨한 연대'라는 단어가 나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개인 시간 중요… 쌍방 소통 자체가 감정노동
서로에게 부담 주지 않는 ‘느슨한 연대’ 선호
언젠가부터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슨한 연대"를 원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자면, 관계 유지가 느슨한 커뮤니티와 같이 별다른 의무나 부담 없이 만났다 헤어질 수 있는 관계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교, 직장, 동호회 등 일반적인 관계뿐 아니라 종교와 같이 정신적인 연대 단체에서도 심화되고 있으며 남녀 간의 연애나 친구와의 우정 같은 개인적 관계에서도 그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물론 '느슨한 연대'가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어느 단체나 관계를 막론하고 서로 간의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고, 강력한 구속력만이 반드시 힘을 발휘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은 인생의 모든 관계를 불편해하고 느슨한 연대로 묶어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얻고 나면 쉽게 타인과 공동체를 저버리는 현상은 분명 이 시대의 어두운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주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을, 단지 소비적인 감정노동으로만 여겨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대화의 어원을 잠시 살펴보자. 대화(對話)의 한자어를 보면, 對(대, 마주하다)와 話(화, 말하다)로 이루어져 있다. 말 그대로 '마주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로는 'conversation'과 'dialogue'의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먼저 conversation은 라틴어 conversari (함께 생활하다, 어울리다)에서 유래된 단어로, con- (함께) + versari (돌다, 움직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dialogue는 그리스어 dialogos에서 유래된 말로, dia- (사이, 통해서) + logos (말, 이성)이라는 뜻이다.
어찌 되었건 각 나라의 '대화'라는 단어의 의미 속에는, 마주한다, 함께한다, 어울린다와 같은 타인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원으로만 미루어보아도 나처럼 내향적인 사람한테는 무척이나 어려운 수고일 것이다.
그렇다고 대화를 포기할 것인가? 대화를 포기한 다는 것은 소통을 포기한 다는 것이고, 소통을 포기한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공동체, 나아가 사회를 포기한다는 의미로도 확장될 수 있다. 결국 그 여파는 종국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개인을 어렵게 만들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대화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럼 우리 인생에서 대화를 어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대화와 소통을 자꾸만 불편한 것으로 여기고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몇 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첫 번째는 개인적 성향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애당초 소극적이거나 타인과의 대화가 매우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공감과 소통을 표현하는 것이다. 대화는 듣는 것과 말하는 것, 두 가지 행위로 크게 구분될 수 있기에 듣는 것만 잘해도 대화의 50%는 성공하는 것이다. 아무리 소극적인 사람도 누군가의 말을 공감하고 듣는 것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개인적인 성향은 어려서부터의 교육에 의해서도 개선될 수도 있다. 보통 유년 시절의 어린아이들은 말이 굉장히 많다. 모든 것을 질문하고 소통하려 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 중 상당수는 자라나면서 극도로 말 수가 적어지고 소통을 꺼려하게 된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특히 부모가 자녀와의 소통과 대화의 창구가 되지 못한다면 자녀는 아마 성인이 되어서도 대화를 기피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두 번째는 경쟁적 사회 구조의 심화이다. 요즘 젊은 세대가 특히나 서로 간의 소통을 감정의 낭비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어려서부터의 극심한 경쟁구도라 생각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입시경쟁에 초등학교부터 시달린 아이들은 어른이 될 때쯤이면,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던 감정의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낸다. 어른이 된 후에는 더 이상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된 것이다. 결국 그들의 선택지는 에너지 소모가 없는 수동적인 삶이 될 확률이 많다. 이 문제는 모든 부모 세대와 이 사회가 거대담론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세 번째는 최근 강화되고 있는 디지털 시대와 AI의 대중화를 들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영향으로 SNS와 메신저를 중심으로 하는 ‘댓글 문화’와 익명성이 보편화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러한 익명성은 당연히 개인화를 심화시키고 서로의 진심 어린 소통을 찾아보기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최근 불어닥친 AI의 기술의 발달과 대중화는 이런 현상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AI의 보급은 이전에 전 인류에게 찾아왔었던 농업, 전기, 산업, 인터넷 혁명과 같은 획기적인 전환점의 수준을 넘어서,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한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AI는 아마도 인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겠지만, 잃어버리는 인류의 가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람 간의 소통과 공동체 의식일 것이다. 앞으로 미래에는 부모의 조언이 없어도, 교사의 가르침이 없어도, 선후배 간의 조언이 없어도, 친구 간의 충고가 없어도, AI의 도움으로 충분히 혼자 살아낼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인생을 과연 단순히 살아내는 것만으로 그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생존이 아닌 생명이 되는 인생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주고 인류의 가치를 지속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화의 수고는 앞으로도 필요할 것인가?
이 질문은 AI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와도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관계성, 공감 능력, 배려와 사랑과 같은 것이 AI와 차별되는 인간 고유의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인간의 고유 가치의 상당 부분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관계도 상대방이 있어야 되고, 공감도 누군가 대상이 있어야 한다. 배려와 사랑이야말로 혼자 하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고, 소통의 방법으로 대표될 수 있는 대화의 수고는 인류의 가치를 보존하는데 가히 필수적인 요소임을 깨닫게 된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대화는 꽤나 어렵고 귀찮은 수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대화의 불편함을 넘어서 소통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각자의 상황과 서로의 관계에 맞는 대화의 방법들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끈기 있게 찾아보고 시도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대화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진정성과 공감이 대화의 핵심이다. 아마도 서로의 선을 지키되 연결과 유대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진정 어린 대화의 기술은 다가오는 시대의 '핵심 Key Word'가 될 수도 있다.
대화는 인간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