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반]프로젝트5
By 이작
지구에 온 첫 외계인 가족이 망명지로 ‘대한민국'을 택했을 때, 세계는 깜짝 놀랐다. 외계인의 망명은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막연히 미국 아닐까 생각했었다.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서 그랬겠지만 이런 일은 대개 미국 아닌가? 외계인들의 모습이 영화에나 나오던 ‘엘프' 같았기 때문에, 미국은 아니더라도 피부색이 비슷한 서구권을 택하지 않겠나 여겼다.
네 명의 외계인 가족이 타고 온 우주선은 태평양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던 미국 방송사의 배 옆에 내려앉았다.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출동한 미군이 우주선을 채 포위하기도 전에, 외계인은 미국 방송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에 지구 망명을 선언했다. 미국으로서는 우주선을 연방정부 관리하에 두고 싶었지만, 이미 100억 인구가 이것을 지켜봤고, 세계 각 국가정부들도 미국이 이 역사적 순간을 독점하는 것을 반대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발빠르게 유엔난민기구가 나서 외계인 가족의 평화적인 망명 신청을 돕고,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유엔난민기구는 외계가족의 망명 절차를 짰고, 모두 23개 국가가 외계 가족 거주 유치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런 절차를 전해들은 외계인 가족의 가장은, 전세계 미디어 카메라 앞에서 선명한 한국어로 “저희는 한국에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발표해 버렸다. 자기네 행성에서 한국드라마가 아주 인기라며 온 가족이 미리 결정했다고 했다.
가장 재미있게 본 한국 드라마가 무엇이었냐는 공동기자단의 질문에 의외의 대답이 나왔는데, KBS의 일일드라마였다. 넷플릭스나 tvN 드라마가 아닌 것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의아해했는데, 아무래도 인터넷 와이파이보다는 공중파가 잘 잡히지 않았겠냐며 ‘문과적'으로 이해했다. 몇몇 과학자들만 우주로의 방송 전파 전달 가능성 연구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외계 가족 유치 신청도 하지 않았던 한국 정부였지만, 그 즉시 외계인 가족을 환영한다고 발표했다. 중국과 일본의 반대가 심했는데, 이런 전 지구적이고 거대하고 역사적이며 인류 최초의 사건을 한국이 할 수 있겠냐는, 한국을 늘 낮잡아보는 오래된 비아냥이었다.
주변국의 반대에 청와대가 내민 카드는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이른바 ‘하나원'이었다. 낯선 사회에 갓 들어온 사람들을 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교육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이기에 외계인도 잘 적응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나원에 대한 북한의 불편함이 잠깐 뉴스를 탔고 미중일 3국은 여전히 불만이었지만, UN과 모든 국가들이 환영 메시지를 냈다.
무엇보다 외계인 가족 스스로가 한국을 원했기에 이후 절차는 쉽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외계주민정착지원사무소, 일명 ‘두리원'이 만들어졌다.
두리원 앞은 외계인을 직접 보려는 사람들과 각국에서 몰려든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한국의 누리꾼들은 외계인 가족에게 애칭을 붙여주었는데, 특히 외계인 가장에게는 ‘아름다운 외모의 외계인'이라며 ‘이외수’라 불렀다. 외계인 가장도 그 이름을 좋아했고 아내와 딸, 아들 모든 가족에게도 원래 이름 앞에 이씨 성을 붙였다.
이외수 씨 가족이 두리원 출소할 때 쯤 불거진 문제는 주민등록번호였다. 앞자리는 생년월일이니 간단했지만, 뒷자리 첫 숫자가 문제였다. 태어난 해에 따라 남자는 1이나 3, 여자는 2나 4로 시작하고, 외국인 남자의 경우 5나 7, 외국인 여성은 6이나 8이었다. 9, 0은 1800년대 태어난 사람들에게 붙였던 숫자였다. 외계인에게 외국인에게 부여하는 숫자를 붙이는 것이 맞느냐는 논란이 생겼다.
하지만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외수 씨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들의 행성에서는 아이들이 남, 여 구분이 없는 무성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들 나이로 15세가 되어 성년이 되면, 앞으로 어떤 성으로 살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또 그들에겐 2차 성징이 있는데, 각기 시기는 다르지만 서른 살 정도가 되면 또 한 번 성을 바꿀 수 있다. 많은 수가 처음 선택을 유지하지만 성을 바꾸는 사람도 꽤 많다고 한다. 이외수 씨의 아내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성별이 없이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숫자를 붙이냐 되물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그동안 주민등록번호에서 성별정보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던 단체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여론은 주민등록법 개정으로 흘러갔다. 주민등록번호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꽤 설득력을 얻었다. 일련번호로 국민을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외수 씨 가족이 가져온 주민등록번호 논란은 그 파장에 비해 결론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싱겁게 정리되곤 했는데, 그 첫번째 해프닝이 주민등록번호 폐지 논란이었다. “주민번호가 없으면 간첩은 어떻게 잡나?”라는 주민번호 탄생설화 같은 주장에 여론은 금세 가라앉았다.
두번째는 개정안 해프닝이었다. 이외수 씨가 직접 방청해 더 관심이 쏠린 “주민등록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방안은 현재의 자리수를 유지하되, 뒷자리 성별정보자리에 기존의 홀수, 짝수가 아니라 ‘가, 나, 다….’로 붙이겠다는 것이었다. 논란이 된 성별 정보에 대해, 앞으로 성 구분을 드러내지 않고, 난수 공식을 넣어 진위 검증 정보로만 사용하겠다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숫자보다 가짓수가 많으니 앞으로 생길 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다만, 현재의 주민번호체계를 한꺼번에 바꾸면 혼란이 있을 수 있으니 이외수 씨 가족부터 적용하고 변경위원회를 통해 희망자부터 변경하기 시작해 순차적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가나다 주민번호'는 방안에 대한 브리핑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온라인 댓글창에
- ㅋㅋ 사람이 자동차야 뭐야.
- 엥. ‘허’자 나오면 졸라 싫겠다.
ㄴ 태어나니 렌트 인생
라는 식의 글들이 올라왔고 자동차번호만은 안된다는 의견들이 소셜미디어를 휩쓸었다.이튿날 행정안전부는 ‘아름답고 과학적인 한글을 사용하고자 했으나, 여러 우려 및 국민 정서를 반영하여 알파벳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부안을 수정한다'고 발표했다.
이외수 씨 가족은 모두 성별과 상관없이 A를 얻었고, 이외수씨의 주민번호는 ‘850229-A246801’이 되었다. 언론에는 850229-A까지만 발표되었는데, ‘A가 외계인 Alien을 뜻한다’는 루머가 빠르게 돌았다. '성별 정보 뺀다더니 외계인 정보는 박제했냐'는 식의 반대 의견도 일부 있었으나 금방 수그러들었다. 이외수 씨 가족이 살 집이 공개되면서 그쪽으로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었다.
IT 선진국답게 기존 숫자 입력체계에서 숫자+문자 입력체계로의 시스템 전환은 발빠르게 준비되었다. 숫자 패드밖에 없는 유선 전화기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행정업무, 은행업무를 보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기존 주민번호가 전환되는 속도보다 유선전화기에서 숫자패드가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라는 주장에 힘을 잃었다.
이외수 씨 가족이 두리원을 출소하면서 열린 행사에서 이외수 씨의 맏딸 '이엘' 양이 커다란 뒷번호만 가린 주민등록증을 양손으로 들고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으로 주민등록번호 논란은 마무리 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엘프'같은 외모의 이엘 양이 모델로 데뷔하느냐 마느냐로 옮겨갔다.
마지막 해프닝은 이외수 씨와 정부관계자 몇몇만 아는 오류였다. 실제로 전산 등록하는 과정에서 자꾸 주민번호 오류가 나는 것이었다. 이외수 씨가 말한, 자기네 행성에서의 생일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1985년 2월에는 29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