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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장 반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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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 Sep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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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반]프로젝트7

By 이작


“영어! 바벨과 함께라면, 오늘부터 원어민!”


어학 교육 기업 ‘바벨 잉글리시’의 신규 기획 회의 발제를 맡은 박영일 팀장이 호기롭게 발표를 시작했으나, 발표 자료 첫 장부터 경영진들의 얼굴은 확 구겨졌다. 성격 급한 마케팅본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박팀장! 지난 달에 과대광고로 행정명령 받은 거 몰라요? 나 엿먹이는거야? 회사 분위기 못 읽어?”

“자자, 열심히 준비한 모양인데 어디 들어나 봅시다. 당장 오늘부터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야, 우리 바벨 잉글리시에 초대박 아니겠어요?”


CEO에게 겨우 발표 기회를 얻은 박팀장이 다음 장을 넘기자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바벨제약의 신약 ‘CZ9h’, 즉 ‘레테’를 사용하는 겁니다.”

“뭐? 레테? 야! 지금 뭐하자는 거야!”


마케팅 본부장이 끝내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CZ9h’, 통상 ‘레테’라 불리던 이 약물은 관계사인 바벨 제약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돕기 위해 개발한 신약이었다. 이 약물과 약간의 시술을 병행하면 특정한 트라우마 기억에 직접 접근해 기억을 지움으로서 트라우마 자체를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감한 방식은 큰 부작용이 있었고, 식약청의 허가를 끝내 얻지 못하고, 수 백억의 개발비만 날린 채, 바벨 그룹에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쉬쉬한 지 2년째였다. 박팀장의 발표가 이어졌다.


“비원어민이 영어를 원어민처럼 말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유창하다 싶은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3천 시간이 필요하지요. 우리 바벨 잉글리시는 그 시간을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집중 관리하는 커리큘럼을 개발해왔습니다. 그러나 말이죠.”


박팀장은 말을 잠시 끊었다.


“본부장님.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기 위해서 3천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3년. 하루 3시간씩 써도 3년을 공부해야 합니다. 1시간이면 10년이에요. 그렇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우리 바벨 잉글리시 매출이 떨어지는 이유. 바로 이 긴 시간! 이거 아닙니까?"


“‘어?, 어… 그야…”


박팀장이 <CZ9h 임상실험 보고서>를 보게 된 것은 입사 동기인 바벨제약의 입사동기로부터였다. 신약 CZ9h-레테가 가진 망각 효과는 탁월했지만 큰 부작용이 있었다. 레테가 들어가면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과 언어 영역이 일시적으로 급격하게 활성화 되었다가, 개발 목적처럼 곧 빠른 속도로 기억과 함께 소멸하는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 사라지는 기억을 조금만 자극하면 되려 영구 기억으로 전환되는데, 이때 잠깐 활성화되었던 언어능력이 유지되는 것이었다.


레테가 치료약으로 쓰이지 못한 것은 이 치명적인 부작용 때문이었다. 많은 트라우마 환자들의 대부분에게 큰 효과를 주었지만, 몇몇 환자들은 스스로 트라우마를 떠올렸는데, 그게 더 강화된 기억으로, 더 영구히 남게되버린 것이었다. 더 심해져버린 트라우마에 끝내 견디지 못한 환자 몇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프로젝트도 멈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박팀장은 이 부작용에 주목했다. 빠르게 지우지만 이때 조금만 자극하면 영구히 남아버린다. 먼저 능력을 얻는다. 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자극만 해주면 된다...


“영상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더듬거리는 본부장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박팀장은 영상을 재생시켰다.


***

광배야. 형이 진짜 너니까 말해주는 거야. 들어나 봐봐. 

자, 니가 차를 한 대 뽑고 싶은데, 돈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넌 사인만 하면 돼. 자동차 대리점에 가면 알아서 은행 다 연결해 줘.그럼 그 자동차가 그 날로 네 것 되는 거야. 할부? 인생이 다 할부지 뭘, 안 그래? 


아니면 돈을 모은다고? 그래, 한 3년 죽어라 적금을 들어. 그동안 아둥바둥 버스 타고 다니면서. 그런데 생각해 봐. 그렇게 차값을 모으잖야? 그럼 꼭 돈 쓸일이 생겨.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꼭 적금 타는 날 아프시단 말이야. 모른 척 차 살 수 있어? 병원비 내야지. 결국 차는 못 뽑는 거야!


어차피 우리는 돈이 없어. 돈을 모으나, 갚으나 어차피 3년이라고 치잔 말야. 

모아서 산다고? 3년 중에 2년 364일동안 버스로, 지하철로 치이면서 고생해야 겨우 3년째 되는 날 차가 생겨. 3년 중 딱 하루 차 있는거야. 연애는 어떻게 해, 차도 없이?

할부로 사. 3년 중에 첫날부터 3년이 끝나는 날까지 매일 차가 있어. 응? 옆에 여친도 태우고 응? 

돈 모으는 시간은 어차피 3년인데 왜 나중에 타야하냔 말야.


뜬금 없이 웬 자동차 얘기냐고? 이게 영어도 마찬가지라니까?

너 지금 미국 사람 만나면 입도 뻥긋 못하지? 점수만 높으면 뭐하냐 말이야. 영어 면접 통과할 실력이 돼? 

그래 영어도 3년이라고 치자. 10년 배우고도 말 못한 영어가, 지금부터 공부 빡세게 3년 더 하면 입이 트여?


잘 들어봐.

30만 원에, 10분 시술이면, 지금 당장 영어 원어민이 된다니까? 그리고 3년 동안 영어를 까먹지 않게 조금씩만 공부하면 되는거야. 

영어 실력을 먼저 사고, 시간으로 조금씩 갚으면 되는 거야. 차 사는 거랑 완전 똑같아. 이게 더 현명한 거 아니야? 언제까지 그렇게 바보같이 공부만 할거야.


광배야, 너두 할 수 있어. 바벨 잉글리시.

***


신규기획 회의에서 박팀장이 보였던 이 영상은, 편집없이 그대로 동영상 플랫폼에 올라갔다. 실제 영어 울렁증이 심한 취업준비생 오광배씨를 섭외해 찍은 바벨의 이 광고는 큰 파장을 불러왔다. 바벨 잉글리시는 광배 씨의 시술 날짜를 10일 전부터 고지했다. 시술 당일. 한 유튜버가 바벨 잉글리시에서 시술 받고 나오는 광배씨를 기다렸다가 기습 인터뷰를 시도했다. 시술을 받은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광배씨는 세련된 영어를 구사했고, 이 서비스 론칭 첫날에만 10만 명이 예약했다.


바벨 잉글리시는 광배씨의 영상을 계속 올렸는데, 광배씨는 원하던 회사의 영어 면접을 통과해 취직을 했고, 비록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새로 만난 애인을 공개했고, 바벨은 둘의 미국 여행 비용을 지원했다. 광배씨가 미국에서 유창한 영어로 접촉사고를 해결하는 영상을 올렸고, 영어 사교육 시장을 점령했다. 


바벨 잉글리시의 ‘레테 잉글리시'가 출시된 지 1년 쯤이 지나자, 매출이 기대보다 더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천성은 원래 게을렀고, 현대인에게 시간은 늘 부족한 현대인에게 하루 3시간의 투자는 말이 안되었다. 레테로 영어 실력을 얻었던 그 많은 사람들의 영어 능력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벨로는 아무런 컴플레인이 없었다. 시술의 부작용은 모두가 알고 있었고, 광고 하단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영어가 사라진다'고 늘 경고했기에 소비자보호원으로부터도 면책을 받았다.


게다가 꾸준히 공부해 영구적인 영어 실력을 얻은 사람들도 몇몇은 있었기에 영어를 까먹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가 그렇지 뭐' 라는 자기 한탄으로 끝내고 마는 것이었다.


박팀장, 아니 이제 박본부장은 할당된 영어 공부 시간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의 게으름에 주목했다. 박본부장은 '레테 잉글리시에 이어 새로 '레테 잉글리시 라이트'를 출시했다. '라이트' 제품은 본 제품보다 효과는 약하지만 대신 매달 1회 약물을 투여받기만 하면 하루 3시간씩 공부하지 않아도 영어가 유지되었다. 처음 1회만 30만원을 내면 되던 비용을 이제는 매달 2만5천원씩, 1년마다 30만원씩 계속 내야 한다는 것쯤은 부작용도 아니었다. 그해 바벨 잉글리시는 한국 말고도 비 영어권 국가들까지 수출해, 바벨 제약과 바벨 전자를 제치고 그룹 전체 매출 1위를 달성했다.


시간으로 갚지 마세요. 돈으로 갚으세요.

매달, 핸드폰 요금보다 싸게 당신의 영어를 유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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