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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시] 돌상의 책과 금반지

by 두별지기


돌상에는 활도 있고 엽전도 있고

쌀과 무지개떡, 먹을 것도 많은데

책을 집었다고 자랑하시던 어머니


그날 분명히 돌 반지를 받았을 텐데

한 돈쭝인지 두 돈쭝인지

어머니는 금반지 이야기는 빼시고

"얘야 네가 책을 집었단다

글자를 아는 것처럼 책장을 넘겼단다"

자랑스럽게 말씀하신다


어머니 배고픈 날에는 정말

돌날 받은 금반지를 갖고 싶었답니다

이삿짐을 쌀 때, 아이가 열나고 기침을 할 때

바람 많이 부는 날, 나는 내 작은 손에 꼈던

그 금반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책 냄새는 생각나는데 금반지에서는

무슨 냄새가 났던가 생각합니다


오늘도 책을 읽으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금반지 이야기는 빼시고

늘 책 자랑만 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봅니다


돌바기 여린 손가락 살 속까지 파고드는 금반지처럼

생활이 날 조여도 돌날 잡은 책들의 문자가 있어


지금 배고프지 않고 지금 부끄럽지 않고

지금 내 집이 있고 내 아내와 내 아들과

밥상에 마주 앉아 있는 행복을 압니다


금반지는 빼시고 늘 책을 잡은 손만 이야기하시던

어머니의 영혼에 이 남루한 책을 바칩니다

돌날 책을 잡았던 그 손으로

당신 아들이 쓴 책이랍니다.



책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_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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