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마부로竈風呂의고향, 교토시 야세八瀬
카마부로竈風呂의 고향, 교토시 야세八瀬
교토가 목욕탕의 성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하야시 히로키林宏樹의 글에는 없으나, 교토에는 또 하나의 역사가 오래된 목욕 방식이 있다. 카마부로竈風呂가 그것인데 외형이나 하는 방식이 우리의 숯가마찜질방과 비숫하다.
카마부로는 몸을 숙이고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하나 나있는 돔 형태의 토방이다. 이 안에 솔잎이나 마르지 않은 나뭇가지를 태워 토방 내부를 뜨겁게 한다. 나무가 품은 수분을 증기로 만들기 위해 마르지 않은 나뭇가지를 태운다. 그리고 소금물로 적신 돗자리 같은 것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누워 땀을 뺀다.
이 카마부로는 교토시 야세八瀬지역의 명물로 야세는 카마부로의 고향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카마부로는 이 지역 이름의 유래와도 관련이 깊다. 딱히 문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텔링에 뛰어난 일본이라 믿을 수는 없지만, 우선 소개해 본다.
이 지역의 카마부로의 역사는 고대 일본 최대의 난이라고 불리는 진신노란壬申の乱(672년)까지 약 14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반란을 주도한 오-아마노오-지大海人皇子(반란에 성공해 텐무텐노天武天皇로 즉위)가 화살을 맞아 교토 히에이잔比叡山의 서쪽 기슭으로 도망을 쳤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토방을 만들고 그것을 따뜻하게 하여 치료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야세矢背(등에 화살을 맞았다는 의미)라고 지었고 이게 변해서 지금의 야세八瀬로 지명이 바뀌었다.
성공한 반란의 지도자가 화살을 맞아 이 지역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데, 이 중요한 사실을 기술한 문헌은 없는 것 같다. 당시 싸우다가 다친 어떤 신분 높은 사람을 치료해 준 사실이 전승되면서 치료를 받은 사람이 오-아마노오-지大海人皇子로 바뀐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카마부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가 보다. 1336년 정월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무로마치막부의 초대 쇼군)가 교토로 입성할 때 그와 대항하던 고다이고텐노後醍醐天皇가 이 지역으로 피해 왔는데, 시중을 들고 있는 이들 중 다친 이를 카마부로에서 치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야세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카마부로
19세기 말까지 야세지역에 몇 개의 카마부로가 있었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이곳이 카마부로로 유명했다는 것은 야세가와八瀬川에 걸려 있는 카마부로하시窯風呂橋라는 이름의 다리를 통해 유추해 볼 뿐이다. 현재 야세에서 카마부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남아있다.
야세 카마부로온센 후루사토라는 긴 이름의 료칸에서 카마부로를 이용할 수 있다.
(지금은 코로나 여파로 임시 휴업 중이다)
카마부로의 발상지인 이곳 야세에서 사라질 뻔한 카마부로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히가시노리마사東則正라는 인물 덕분이다.
패전 후 만주에서 돌아온 히가시는 지병인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했다. 어릴 적 카마부로에서 이런 병들을 치료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있던 그는 남아 있던 카마부로에서 지병을 치료하였다. 치료에 도움이 많이 되었는지 새 가마를 지어 이용했다. 예전부터 있던 가마는 실내에서 불을 피워 내부를 덥히는 데 10시간 이상이 걸린 데다, 공기가 탁해서 숨쉬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닥을 데워 벽의 반사열을 이용해 보니 숨쉬기 편했다. 지금의 에이잔덴테츠叡山電車 야세히에이잔구치역八瀬比叡山口駅 근처에서 1954년 영업을 시작하였다. 그 지역에 놀이공원이 들어서는 바람에 1961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다. 많았을 때는 가마가 6개나 있었는데 지금은 단 하나 남아서 야세 지역 가마부로의 명맥을 잇고 있다. 자손들이 이어가며 가마부로 영업을 하고 있는데 지금의 주인장은 노리 마사의 손자이다. 료칸 부지 내에는 그를 기리는 흉상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