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 Aug 29. 2022

종이 정거장

열한 번째 정거장 | 작은 나의 우주

종이 정거장에서 출발하는 역들은 '야수파(fauvisme)', '인상파(impressionism)', '팝아트(pop art)' 들과 같은 거대한 대도시 같은 덩어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서로 가까운 자리에 붙어있는 역들이 존재합니다.  서로 이번에 방문하기로 마음먹은 '고상현'역도 이렇게 모여있는 역들의 모임들 중 가장 최근에 생긴 '실험예술'에 관한 것입니다. 최근 점점 영역을 넓히고 있는 실험 예술이기에 Y는 꼭 이곳에 한 번은 들러보아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Y는 '고상현'역 까지 오는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오랜만에 펼쳐보았습니다. 오랜만에 살펴본 이 천문학 베스트셀러는 이번에 방문할 역을 위한 특별한 사전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상현'역은 인간에게 미지의 공간인 우주에 대한 작은 연구실입니다. 플랫폼 너머 격리된 하얀 공간에는 여러 실험들을 위한 실험 연구자만의 실험 도구들과 그 결과물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예술과 실험은 극과 극에 있는 단어들의 조합처럼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음악, 미술, 무용처럼 예술의 영역이 확실하게 나뉘어있던 과거와 달리 경계선 없이 마구 뒤섞여 나타나는 현대에 일명 '실험예술'들이 점차 나타나고 있습니다. 실험예술은 여러 형태의 실험이 나타나는 만큼 난해한 이야기를 가지는 경우도 있기에 비주류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실험예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우주상자 | 상자공간> (2018) 나무상자에 스텐실, black 2.0 도료, 생활 먼지, 45일간의 은둔생활, 762x685x330.2mm

실험실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고상현'역의 공간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놓인 나무 화물용 상자입니다. 사람이 혼자 들고 옮기기 적당한 크기를 가진 이 화물용 상자는 뚜껑이 열린 채 바닥에 놓아져 있습니다. 고개를 숙여 바라본 이 상자 안에서는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이 우주 속 떠다니는 별들은 은둔 생활 중에 발생한 각종 생활 쓰레기와 먼지 가운데 자신의 새끼손톱 크기의 조각들을 수집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상자 겉면에 전사한 내부 용적에 대한 수치는 현대 과학으로 관측 가능한 우주의 부피로 계산 후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 작품 속 가장 유명한 상자를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Y는 어린 왕자의 양이 들어가 있는 그 상자를 떠올립니다. 어린 왕자가 원하는 바로 그 양을 담고 있지만 그 양을 보여주진 않는 그 상자와 Y의 눈앞에 놓인 화물 상자는 모두 영원히 그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허상을 재현해 이상을 충족한 듯합니다. 실험실에서 상자에 담아놓은 우주는 실제 우주가 아닙니다. 실제로 만지거나 자를 수 없는 공허한 공간인 '우주'를 담아보고 싶다는 희망 사항으로 만들어 넣어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험실의 상자를 보며 우주를 누비는 어린 왕자의 상자와 닮은 것은 둘 다 우주 저 머너 별이 가득한 곳에서 왔기 때문이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예술에서 우주(宇宙, Cosmos)는 과거 피타고라스가 처음으로 혼돈에 대립된 개념으로서 어원적으로 질서와 분석을 의미한 것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화'로써 뻗어나가게 되었습니다. '타타르키비츠 미학사:중세 미학'에서 설명하는 '예술의 우주론적 개념(The Cosmological Conception of Art)'에 의하면 조화는 우주론의 한 분과로 다루어졌던 음악에서 조화는 우주의 한 속성(musica mundana)이며 인간은 조화를 창조하지 못하고 발견할 뿐이며, 자기만의 조화를 만들어내기보다 우주의 조화를 지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본질적인 것은 존재의 조화를 이해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또한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이 아닌 우주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 견해는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화물용 상자 속에 담긴 우주는 '나'라는 존재를 우주와 동일시하며 이를 박제한 축소판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기 위해 물리학적 용어들을 가져와 우주로써의 값을 내린 것처럼 보입니다. 작은 상자 속이 은둔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낸 부산물로 만들어진 수많은 별들을 담고 있다는 것은 별들을 품고 있기에 상자 속 검은 우주는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지구 밖 우주의 축소판인 것과 동시에 '나'라는 존재 깊숙한 곳에 품고 또 다른 우주는 상자에 갇힌  것 입니다.


<공> (2019-2021) 연쇄 실험 행동, 고형화 계속 시간 499일

상자에서 고개를 들면 보이는 새하얀 벽에는 무언가를 기록한 듯한 종이와 실험에 사용한 것 같은 물품들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작은 아크릴 상자에 갇혀 있는 공을 만드는 이 실험은 Google Earth에서 지구 표면을 모두 아우르는 1,046장의 위성사진을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사진들을 등사용 투명필름에 인쇄하고 알코올 수조에서 사용된 잉크를 씻어낸 뒤 혼합된 용액을 장시간에 걸쳐 건조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추출한 고형 안료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굴려져 작은 검은 공이 되었습니다.  


이 실험은 아주 큰 공간을 가장 작은 미니어처로 만드는 실험처럼 보이기도 하고 지구를 압축시키는 방법에 대한 실험 같기도 합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백업 지구를 만들었던 것처럼 압축된 데이터 파일을 모으고 누른 후 암호화시켜 그 누구도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도록 혹시 모를 지구를 향한 위협에서 구해내기 위한 마지막 보루처럼 비밀스러워 보입니다.


이 실험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결과물인 '검은 공'입니다. 공이 가지는 원(圓)과 구(球)의 형태는 우주 그리고 천문학과 떼어놓을 수 없는 형상입니다. 고대 그리스는 기하학적 원리를 통해 신이 창조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러한 원리가 가장 잘 적용된 곳이 '하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규칙적인 회전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성과 별들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기하학 도형을 따라야 했고 그것은 바로 원이었습니다. 이후 플라톤을 지나면서 원을 통한 천체 이해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현대 천문학에서 이런 기하학적 철학은 사용되지 않지만 원과 그의 3D 입체형인 구는 아직도 예쁘고 좋은 것, 완벽한 것을 의미할 때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치 귀여운 아기의 얼굴을 달덩이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지구도 역시 이러한 구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너무 방대한 지구의 크기는 이러한 사실을 자꾸 망각하도록 합니다. 마젤란이 증명한 둥근 지구를 아직도 믿지 않으며 음모론과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눈앞에 압축된 이 검은 지구는 둥글며 끊임없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작은 공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금 눈앞에서 이야기합니다.


<청색편이> (2021) 작가의 털, 타액, 각종 분비물, 91장의 별자리 방위도, 천체 경계 좌표 데이터(국제 천문 연맹), 각 304.8x304.8mm

실험실의 가운데 놓인 책상 위에는 별자리 방위를 표시한 천체지도 91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처음 보는 독특한 안료들이 함께 놓여있습니다. 이 안료들은 개인 생활공간 9곳에서 수집한 자기 몸의 먼지, 분미물을 이용하여 총 9가지 종류로 만든 것입니다. 실험실에서는 이 안료를 이용해 지구에서 관측 가능한 별의 모든 위치를 털과 몸-안료를 사용하여 방위도들을 제작하였습니다.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안료들은 맨 처음 보았던 <우주상자|상자공간>처럼 '나'의 우주를 기록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입니다. 우주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행성들은 성간에서 성간의 기체와 먼지들이 밀집된 곳에서 수많은 물질들의 융합되며 탄생합니다. 이렇게 생겨난 행성들은 태양처럼 어마 무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토성처럼 거대한 가스로 이루어져 있기도 합니다. 별들의 탄생과정은 별의 죽음과 함께하기에 우주의 모든 물질의 근원으로 보곤 합니다. 털, 타액, 몸에서 떨어진 각종 분비물들 역시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죽은 세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먼지들은 안료화 되고 방위도 위에서 융합돼 새로운 탄생을 맞이합니다.  


별자리는 기원전 3천 년경 바빌로니아 지역의 유목민 칼데아인들이 밝은 별들을 동물에 비유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2천 년경 페니키아 인들에 의해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천문학이 그리스로 전해졌고, 기원후 150년경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가 그리스 천문학을 집대성하면서 15세기까지 그 영향을 끼쳤습니다. 본디 별자리의 역할은 길잡이였습니다. 가장 먼저 별자리를 사용한 칼데아인들이 그러했으며, 15세기 이후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 위한 대항해시대에 수많은 별자리들이 항해사들의 길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떠있는 눈부신 대낮에도 정확한 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현대에서는 그저 하늘의 구획을 나누기 위해 사용되는 요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과거 맨눈으로 보지 못했던 더 먼 곳에 존재하는 행성들, 미약한 빛을 내뿜는 별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태양계 그 너머는 상상하지 못하며, 지구를 덮은 거대한 반원 형태의 뚜껑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던 우주는 이제 없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인간은 모두 별-먼지에서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약 46억 년 전 별-먼지에서 태어난 박테리아가 진화해 지구 위를 가득 뒤덮은 것이라고 말이죠. 이런 우리가 태어난 곳, 즉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과학의 발달이 상상의 나래에 불과했던 수많은 꿈들을 실현시킴에도 불구하고, 우주에서 맨몸으로는 아주 잠시도 생존할 수 없는 인간에게 우주는 회귀본능을 일으키며 대자연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인간에게 있어 궁극적 목표일지도 모릅니다.   




역의 공간 속에 담긴 작은 우주를 끊임없이 관찰하는 '고상현'역은 광대한 우주 속 지구 안 우리에게 너는 아주 작고 먼지 같은 존재임을 인식하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나'라는 존재가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같은 존재인지 증명하기 위한 실험 결과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Y는 옆구리에 끼워두고 있었던 <코스모스>를 다시 가방 속 깊은 곳에 정리합니다. 우주에 대한 고찰의 여정은 이 플랫폼 위에서 마무리 지어졌습니다.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자신의 우주를 찾기 위해 Y는 또다시 다음 역으로 떠날 준비를 합니다.


표지 - 극극공존 (2017) 혼합매체, 가변설치
이전 11화 종이 정거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