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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Sep 20. 2022

종이 정거장

열두 번째 정거장 | 1 min = 1 gram

달리는 기차 한 곳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Y의 시간은 기차보다 빠르게 흘러갑니다. Y는 기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해왔습니다. 꽃들이 만개하는 5월에 충동적으로 시작된 여정은 벌써 열매를 맺는 계절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시간과 함께 쌓인 여행의 기록은 여행을 시작할 때 Y 스스로에게 한 역을 짓겠다는 약속에 무게를 더합니다. 


양 떼 같은 구름이 가득한 가을 하늘 아래 Y를 태운 기차가 역에 멈춰 서기 시작합니다. Y의 이번 도착지는 '이윤서'역입니다. 초현실적일 만큼 새하얀 '이윤서'역의 공간은 우리가 생활하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일상적 물건들과 째깍거리는 소리로 역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시계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물건들은 '오브제(objet)'라는 이름으로 예술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브제는 일상의 물품이나 자연물 등을 원래의 그 기능이나 있어야 할 장소에서 분리하고, 그대로 독립된 작품으로 제시하여 일상적 의미와는 다른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가장 친숙한 작품으로는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1917)을 꼽을 수 있으며 뒤샹은 이 작품을 통해 기성품이라는 뜻을 가진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습니다. 

개별적 사연들(Individual Episodes), 2022, 가변설치, Re-Cover 프로젝트 속 사물들, 텍스트 프린트

가장 먼저 Y를 맞이하는 하얀 공간에는 프린터기, 전등, 커피포트 같은 물건들이 하얗게 표백되어 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흰색 물감에 가려진 기존의 것들, 흰색은 비워버리는 동시에 그 자체로 채우는 역할을 합니다. 때문에 오브제들의 이전의 재질이나 색깔과 같은 특징들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양'이라는 색은 가시광선을 모두 반사시켜버리는 그 특유의 성질로 인해 주로 투명하고 고결함을 상징합니다. '이윤서'역에 설치된 오브제들은 흰색이 가지는 상징 중 투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술의 전시공간하면 떠오르는 새하얀 벽과 바닥을 가진 공간에 놓인 이 오브제들은 마치 투명한 유리가 되어 벽과 바닥을 온전히 비추어 보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별적 물체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3D환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브제들에 덧 발려진 흰색으로 생긴 빈 공간은 오브제들이 자아를 잃어버린 빈 공간 '보이드(void)'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얀색이 가진 투명함과 반사성은 오브제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무게, 재료와 함께 오브제를 제작한 회사, 오브제를 이곳에 둔 사람까지 한꺼번에 반사시키고 투명하게 만들어 마치 오브제가 가진 수많은 특징들과 이곳까지 오게 된 과정들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오브제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특징들이 사라지자, 비어버린 공간을 메꾸기 위해 역을 방문한 여행객의 상상력이 동원됩니다. 그러나 오브제가 가지는 껍데기가 우리의 상상력을 방해합니다. 익숙한 외관이 상상력을 이곳에 맞출 것을 강요합니다. 이러한 강요는 사실 우리의 인식 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이미지의 영향과 동시에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 규율과 기준에 자신을 꿰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의 무의식적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얀 오브제들과 떨어진 곳에 자명종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양쪽에 종이 달린 검은 시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익숙한 시계의 모습과 달리 붉은색 바늘을 하나만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계의 얼굴은 부엌에서 가끔 보이곤 했던 저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윤서'역을 지은 이는 과거 불면증으로 고통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시계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불면증에 시달린 사람들은 밤이 되면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정서적 압박과 시간의 무게를 상징합니다.

'시간의 무게'라는 말을 마치 관용구처럼 자주 사용합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로써 존재하지 않기에 무게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무게는 몸무게와 같은 것이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쌓인 경험과 지혜의 관념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무게'가 표현 수단으로써 선택되었을까.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물질이 무게를 갖는다는 것은 자연이 그 물질과 다른 타자이자 동시에 물질 자신의 중심을 자신 바깥에서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설명했습니다.(1) 이러한 헤겔의 주장에서 엿볼 수 있는 점은 우리 시간을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우리의 바깥에 있는 개별적 존재로 인식했기에 '무게'라는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To Dream-To Realize, 2021, 가변설치(시계: 31x31x5.5cm, 플랫폼: 107x61x20cm)

VIDEO 자명종을 지나쳐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벽의 모서리에 걸린 시계들이 벽이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5개씩 나뉘어 걸려있습니다. 재깍재깍 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시계들 사이 바닥에 놓인 검은 판 위에 올라서면 모든 시계가 일제히 멈춥니다. 이 시계들은 내가 원하는 순간에 멈추게 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10개의 시계의 얼굴을 잘 보면 숫자가 아닌 알파벳들이 적혀 있습니다. 각 시계들은 'TO REALIZE(깨닫기)', 'TO SAVE(구하기/저장하기)'와 같은 서로 다른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텍스트들은 시간을 사용하고자 하는 개인적이고 이상적인 욕망과 사회적 시간을 고려하는 관습적인 규범 사이의 충돌을 의미합니다. 


Pause, 2020, 32x32X46cm, 나무, 시계, 스피커, 압력 센서, 아두이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검은 스툴이 Y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의자처럼 보이는 이 스툴은 우리가 앉는 부분에 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VIDEO 이 시계 의자의 위에 앉으면 시계 소리가 차단되고, 몸으로 가려져 시계를 보지 않게 됩니다. 다시 일어나면 다시 시계가 내는 소음이 들립니다. 시간은 굴러가는 공과는 달라서 물리적으로 멈추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의자 위에 앉아 시계의 소리를 차단하고 시야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시간이 주는 제약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계는 현대미술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오브젝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시계가 그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의 <기억의 지속>(1931)에 등장하는 시계들은 녹아내리는 형체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시계는 정확성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흐물흐물해져 버린 시계는 그 쓸모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완벽한 연인들)>(1987~90)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특별한 전시 조건이 적혀 있는 문서로 남아있습니다. 토레스는 자신의 작품이 재생되고 영속되기를 기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형식을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완벽히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두 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긋나다가 어느 한쪽이 멈추게 됩니다. 

"시계는 서로 맞닿아 있어야 한다. (중략) 두 시계의 분침과 초침을 서로 맞추지만, 이는 결국 전시 중 두 시간이 엇나갈 것에 대한 이해를 전재로 한다. 만일 한 시계의 배터리를 갈아야 할 경우 그렇게 할 것이며, 두 시계의 시간은 다시 맞추도록 한다." | <무제(완벽한 연인들)>의 전시 조건

'이윤서'역에서 시계들은 형태적으로는 토레스의 시계와 유사하지만, 이 둘의 시계가 가지는 의미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에 걸린 시계들은 벗어나야 하는 것이며 부정적인 의미를 취하고 있습니다. 모더니즘이 제시했던 시간의 정확성은 우리와 충돌하고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간에 대한 생각은 고대 그리스 철학가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4세기 성 어거스틴(St.Augustinus)은 내면에서 체험된 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의식이 지각하고 있는 시간이 현재이며 이 현재에서 일어나는 기억 작용을 통해 시간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는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이자 이미 흘러가서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기에 현재만이 존재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카이로스'는 마음의 시간이자 과거는 기억에 있기에 현재이고 미래는 기대에 있기에 현재인 시간을 말합니다.(2)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은 시간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후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이 시간에 대해 진정한 시간이란 살아 움직임으로 인해 내적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창조의 시간이며, 수학적, 물리적 시간은 추상적인 시간이기 때문에 진정한 시간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문학 연구의 주요한 테마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윤서'역에 놓인 시계들은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은 내면의 시간임과 동시에 우리의 의자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수학적 시간의 교집합입니다. 가만히 둔다면 그대로 흘러가버리겠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는 순간 내면의 시간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의지를 가지고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물리적인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시간성을 멈춘다는 것은 사회적 규약에서 벗어남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시간과 관련된 사회적 규약들이 존재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꼭 가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취업을 해야 하고, 30대에는 결혼을 하는 것과 같은 규약들은 사회가 개인이 가지는 선택의 자유를 가로막고 다른 선택지들은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윤서'역에서는 이러한 통념들까지 포함하는 시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시간의 흐름을 지닌 도피처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객이 개입됨으로써 완성되는 이 시간에 속하는 관객이 없다면 이 역에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공허함일 것입니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겼던 Y는 이제 '이윤서'역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Y가 머무는 동안 흐르던 역의 시간은 다시 제자리에 서서 다음 방문객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멈춰서 있던 Y의 시간은 역을 떠나는 기차에 오르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표지 - 불편한 자장가 2 (부담스러운 시계), 2020, 12x17x5.6cm, 알람시계, Ibs 저울 디자인


(1) 헤겔 자연철학에서 중력과 무게, 박병기, (2014), 한국헤겔학회, 헤겔연구 36권 0호

(2)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5) 아우구스티누스 (중) 시간론, 생글생글 5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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