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텃세 2

앞사람 발 터치하면 손 잘린다

by 젼샘

내 앞에 서는 분들은 나이가 열 살도 넘게 차이나는 언니(?)들이다.

수영 경력이 아니어도 일단 나이로 제압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들에게 꿇어야 할 이유는 백가지도 넘는다.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고인물을 제치고 앞서는 것은 하극상이다.


20년 만에 수영장에 다시 오니 낯설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죽기 살기로 앞사람을 쫓아가려면 어떤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물살을 가를 뿐이다.

진정한 고수라면 상황에 맞게 속도를 조절하겠지만 난 다시 돌아온 햇병아리 회원이라 그럴 능력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물살을 가르던 어느 날.

앞에 가고 있는 10살 많은 언니의 발에 내 손이 닿았다.

가뿐 숨을 뱉으며 레인 끝에 섰는데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비아냥이 허공을 떠다녔다.


"아이고... 우스워죽겠네... 우스워죽겠어....(너털웃음 같기도 하고 비아냥 같기도 하고)"


그때는 몰랐다. 내가 들은 것이 그것뿐이지 앞뒤로 어떤 말들이 더 붙어있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말이라 내가 붙잡아야 하는지 아닌지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런데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를 향한 말 같았다.


수영장에서는 무위의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값진 것으로 휘감아 내가 누군지를 보여줄 수 없다.

내 직업이 무엇인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수영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과 물 찬 제비처럼 물살을 유영하는 수영실력만이 나를 뽐낼 무기이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수영 실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면 날 것의 무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뒷사람 손이 내 발에 닿았다는 것은 생존상황이라면 잡혀 먹힌 것과 같은 느낌일까?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앞사람을 제치고 추월하는 것을 "딴다"라고 하더라.

설마 목을 딴다는 것은 아니겠지? 후들후들

오싹오싹 너무 무섭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내가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겠다는 것은 인간 본능에 따른 생존을 뜻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긴다는 것, 제쳤다는 것이 그토록 짜릿한 중독성 있는 기분인 걸까?


어쨌든, 내가 잘 조절해서 앞사람 발에 터치하지 않아야겠다....라고 가볍게 생각을 정리했다.

모든 사람이 나랑 찰떡같이 친해질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으니 그 분과 친해지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샤워실에서 갑자기 내 허벅지를 손으로 쓱 쓸어내리며

"무슨 운동했었어요? 하체가 튼튼한 사람이 난 제일 부럽더라~"

억지로 말을 붙이려고 칭찬거리를 만들어내는 모양새다.


Ha.... 그분이 마음이 불편하셨나?

난 그럼 그분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나?

불쾌했던 기억 지우고 오늘도 당사자 모르게 내 마음속에서 그녀를 용서하고 빵긋 웃어야 하나?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그 구역의 미친년이 되어서 파란을 일으키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계속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는 걸 아무 저항 없이 수긍하는 것이 무기력하게 느껴져 싫다.

적극적 저항과 무조건적 수용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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