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하지 않는 거야
아무리 봐도 우리 어머니보다 연세가 더 있으신 분인 것 같다.
입을 달싹이며 말할까 말까를 백번도 넘게 고민한 표정의 어르신이 숨을 가쁘게 고르고 있는 내게 다가온다.
"저기...
옆 레인이 다 와서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는 출발하지 않는 거야. 옆 레인이 너무 오래 기다리게 되니까"
"아~네....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상급반에는 ‘상급’과 ‘최상급’ 두 레인이 있다.
나는 그중 ‘상급’이다.
최상급은 자유형 7바퀴,
그냥 상급은 5바퀴로 스타드 웜업을 한다.
그런데 최상급 레인이 7바퀴를 다 돌면
그냥 상급은 5바퀴를 다 돌지 못하더라도 멈추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강사 1명이 상급, 최상급 두 레인을 동시에 지도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최상급 레인이 운동을 마치면
강사는 그쪽 강습을 진행하고,
이어서 상급 레인이 끝나면
그때 상급반을 지도하면 된다.
굳이 내가 운동량을 줄여가며 최상급반의 리듬에 맞출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하다며
최대한 고인물님의 심기를 건드릴 마음이 없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계속 마음이 찝찝했다.
왕고참 어르신이 나보다 속도가 느린 회원에게 자꾸 내 앞으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새로 들어온 신입은 속도와 관계없이 맨 뒤로
가야 할 것 같은 텃세에 나는 맨 뒤로 가 섰다.
그래서 5바퀴를 다 돌고 들어오면
다들 나를 기다리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내 앞 어르신이 1바퀴가 남았는데 안 가고 멈추시길래 힘들어서 안 돌고 쉬시려나 보다 했다.
그래서 나는 남은 한 바퀴를 돌려고 출발했다.
그 한 바퀴가 문제였다.
내가 한 바퀴를 돌 동안 나를 기다리며 얼마나 혀를 끌끌 찼을지 안 봐도 비디오닷.....
사회적 동물로 사는 것이 정말 피곤하다.
정글에서 살아남아 행복해지려면 어디까지 눈치채고 어디까지 모른척해야 적당한 걸까?
뭐 얼마나 대단한 운동 한다고
이 불편감을 감수해야 하는 걸까?
갑자기 산후조리원에서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오른다.
하루에도 150명의 학생들과 복닦여야 일과가 끝나던 생활을 하다 출산을 하고 조리원에 들어가니 독방에 나 혼자였다.
아기와 있더라도 잠깐이고 아기는 말이 없으니 혼자였다.
그렇게 며칠 보내고 조리원에서 엄마들이 하는 프로그램을 하러 커뮤니티룸에 가려는데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자! 자!
"아~ 네~ 오~ 그렇군요~~~"를 연습해 봐!!!
아... 너무 싫다....ㅜㅜ
사람들 이야기 경청하고 끄덕이고 맞장구치는 거 하기 싫다....
그때 알았다. 내가 엄청난 E(Extraversion, 외향형)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사람들과 부대껴 살며 나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구나...
우리는 눈을 뜨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발끝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올려 사회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하는 교무실엔 14명의 교사가 있다.
그 중 외향형 교사는 2명뿐이다.
대부분의 I형 교사들이 그 많은 학생들을 만난 후 얼마나 너덜너덜해져서 퇴근을 한다는 것인가.
나는 고작 10명 남짓 모여있는 수영 레인보다 더한 역동속에서 밥벌이를 하지만
그 상황에 익숙해져 있을 뿐
그렇게 버티며 매일같이 소진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영장에서 이겨내야 하는 것은 물살뿐이 아니다.
눈빛 하나, 숨 고르는 타이밍 하나에도 질서가 흐른다.
물은 맑지만, 우리 마음까지 투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또 다른 결의 위계를 익히고 적응해서 스트레스가 아닌 익숙함으로 여길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수영장 텃새의 글이 몇 화까지 이어질지 나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