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지킴이

by 젼샘

나와 파동이 같은 사람?

나와 벡터 값이 같은 사람?

같은 좌표로 수렴하는 사람?

영혼의 단짝이나 도플갱어라는 진부한 표현은 싫은데....


그녀와 나는 공감대가 너무 많았다.

급한 성격과 치밀한 계획력, 불도저 같은

실행력을 지녔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다.

두 손 두 발 걷어붙이고 새 학년 맞이

교무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청소가 사명인 나는

모든 것이 다 내 일인 것 마냥

목장갑을 끼고 작업복 같은 옷을 입고

온몸을 던지며 정리정돈을 하고 있었다.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기 때문에

정리, 정돈이 아닌 분진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나 혼자 해서는 티도 안나는 것들이었다.


목장갑 끼고 여기저기 설레발치고 있었는데

신규전입교사가 갑자기 내가 들고 있던 폐박스를 뺏어든다.


??

헛!


누가 뺏어가도 아깝지 않은 쓰레기이다만,

어찌하여 새로 온 사람이 기존에 있던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만지고 치울까?

생김새는... 차가운 도시여자.....

너~어~무 예뻐서 남자들 틈에 둘러싸여서 손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은 공주님...


아무리 새로 오신 분은 이런 거 하지 마시라고 해도 그녀는 막무가내로 내가 하는 걸 고대로 따라 한다.

너무 신선한데?

허드렛일을 저렇게 나서서 한다고?


고마웠다.

내 눈에만 보이는 일이 그녀 눈에도 보이다니...

첫눈에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는데

우린 나이차도 많이 나고

어떤 공감대를 가져야 할지 몰랐다.

물론 내가 훠얼씬 언니다 ㅎㅎ



세계관 재정립을 하며 에너지가 떨어진 내가

뭔가를 생각만 하고 있으면

그녀의 에너지가 더해져

바라던 일들이 눈앞에 척척 가시화되었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서 선택한 방법은

화훼장식기능사 자격증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필기시험에 합격한 상태였고

혼자서는 실기를 준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같이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평소 꽃을 좋아했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딴 직후라

아직 매일 할당해 둔 공부 시간에 몸이 길들여져

남는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던 터였다.


아침에 라떼 마시며 필기 책을 후루룩 넘겨서 보니 합격이다.

공인중개사 준비에 비하면 이건 패션잡지 읽기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실기였다.


생화를 양재에서 사다 날라 집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만들어보는데

이건 무슨 스파르타 재수학원보다 더 빡셌다.

하루 종일 꽃을 만지면 힐링될 것 같지만

생각보다 고된 강도의 노동이었다.

평일 근무를 마치고

일요일 8시간을 온종일 학원에 있었다.

몸이 견뎌내지를 못하니

몸살에 구토, 대상포진 등등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실기에 한 번에 합격하고

우리는 꽃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항상 이야깃거리를 꽃피울 수 있었다.


무엇이든 여과 없이 말할 수 있었고

내 속마음을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공감해 주었다.

그녀의 끄덕임과 추임새 덕분에

나는 내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생각이 정리되고

혼자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실은 그녀가 상담심리공부를 했고

그 분야에 자격증이 있어서

나는 공짜로 상담을 받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SCT검사에

'나는 나중에 ____________이면 좋겠다'라는 항목이 있다.


2025년 8월,

'나는 나중에 작가가 되면 좋겠다'라고 적었다.


그런데 9월 22일,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되었다.


내 이름으로 출간한 책이 있어야 진짜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는 사람들이 온라인에 생겼다.

작가라는 말이 너무 부끄럽고 가당치도 않은 것 같아서 손발이 오그라든다.^^;;

온몸이 귀까지 빨개지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김미경 강사님은

10년 후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래서 지금 그 꿈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20여 년간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고

작가가 되기 위해 책을 읽고,

삶속에서 글감을 모았다.


학교에서 악성민원이 발생하면

나는 이 상황이 책 속에서 벌어지는 허구라고 상상했다.

나는 주인공 캔디였다.

외로워도 슬퍼도 눈물 한번 훔치고 씩씩하게 웃었다.

힘든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것은 나의 글감이 된다는 생각으로 감정을 덮고 살아왔다.

그렇게 상상하며 삶을 대하니 내 삶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견딜만했다. 어차피 이 이야기의 결론을 짓는 건 나였으니까 내 삶의 주도권은 언제나 나에게 있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고 언제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아서 좋았다.


그래서 나는 삶이 막힐 때마다 글을 썼다.

비공개 글을 써서 고통을 날려 보내기도 하고

아이들과 방학마다 한 달살이를 하며

재미난 에피소드 가득한 블로그 글을 쓰기도 했다.

주로 서평 쓰기를 즐겼다.

책 속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글귀를 놓치고 싶지 않아 적어두고 깊이 되새김질했다.


그렇게 힘겨운 현실을 부정하고 공상 속에 빠져 살던 내가 진짜 작가가 된 것이다.

브런치 작가 도전 두 번째 만에 글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나는 20년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다.

대단한 필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쓸 때 나는 외롭지 않다.

나도 몰랐던 내 생각이 정리되고 머릿속에 질서가 생겨났다.


그렇게 작가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내 인생에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가족 중 크게 관심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꽃다발과 케이크와 함께 축하파티를 벌이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런 상상을 했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어느 날 현관 벨이 울리더니

꽃다발과 함께 작가 젼이라고 각인된 볼펜을 든

꽃다운 그녀가 서있었다.

작가 된 기념으로 파티를 하자고 한다.

나는 볼펜을 집어 들고

'행복하세요~2025.9.22. 유수달님! 작가 젼샘' 이라고 끄적여보았다.

손이 부끄러웠다.

내 까짓게 뭐라고.....

집 앞 치킨 집에 가서 생맥주 잔을 부딪치며

치킨을 뇸뇸 먹고 행복 가득한 기쁨을 나누었다.


참 고마운 그녀이다.

고깃집에 가면 내게 절대로 집게와 가위를 주지 않는다.

남들 챙기는 걸 기쁨이라고 여기는 내가 안쓰러운가 보다.

나를 돌보고 나를 귀하게 대접해 준다.

깨작거리는 내 접시에 수북하게 고기를 집어다 놓아준다.

왜 안 먹냐며 내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를 집요하게 주시한다.

그녀를 만나면 나는 너무 조급해진다.

내 이야기를 찰떡같이 들어주고

폭풍 공감을 해주는 그녀와의 시간 동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와르르 쏟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을 우물거릴 시간이 없다.


내 상담 선생님이

나를 돌보는 사람 틈에서 지내라고 했다.

나를 이용하고 내가 호구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곳을 찾으라고 했다.

나에게는 그녀가 그렇다.


우리는 잿빛일상에 한 줄기 햇살을 더하려고 늘 머릿속이 분주하다.

어떤 일을 계획하든 우리 둘이 마음이 통하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

그렇게 서로 힘이 되고

그렇게 함께 성장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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