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는데
굳이 그렇게 한날 한시를 정해서 만나야 하는 것일까?
생신, 명절이야 반드시 그래야 하는 날이지만
굳이 김장까지 그래야 하는 것일까?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 날이면
좀 그냥 넘어가는 너그러움과 여유,
왜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김장이 싫다.
친정엄마야 절인 배추 택배로 받아서 쉽게 하시니 소소하게 거기서 버무려오든지
어쩜 엄마는 다 해놓고 가져가거라~~
하실 가능성도 크다.
직장 다니는 딸 동동거리며 다닌다고
애처러워 그냥 가져가거라 하실 가능성도 크다. 남편 혼자 김치 먹으니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조금 사먹으면 만사가 편할 일이다.
그런데 김장 때만 되면
무슨 대역죄인이 된 것 마냥 숨을 죽이게 된다.
'어머니...언제 가면 될까요?'
'한 달 전부터 매일 하나씩 다 준비해놓고 있다.
일주일 내내 마늘을 까서 손 끝이 아리다.
아버지랑 내가 절여 놓을라니까 새벽에 일찍 오너라.'
아..
네....
(꿀먹은 벙어리)
....

제가 뭘 사 가지고 갈까요? 수육할 고기 사가지고 갈까요?'
'그거는 니 동서한테 사오라했다. 니는 기름 없는 걸로다 LA갈비 좋은걸로 사오너라.'
'아...당일에 먹을거면 미리 재워서 가져 갈까요?'
'아니다. 우리 먹을거 아니다. 나중에 집에 손님올때 쓸거다.'
뭐라도 사들고 가면 죄사함을 받을 것 같은 마음에 감사하기까지하다.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것일까?
이것은 결혼과 동시에 짓게 되는 원죄같은 것인가?
어머니가
첫 암 투병을 하고 건강을 회복하셨을 때
자식들을 위해 김장을 해 줄 수 있음에 감사하셨다. 나도 기뻤고 감사했다. 앞으로는 누가 먹든 말든 그저 효도행사려니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참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
나는 왜 김장철만 되면 그리도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고 옹졸해 지는가 말이다.
수능감독, 지필평가 출제기간, 고3 엄마.... 이 쯤 되면 김장 같은 건 안 해도 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마그마 끓어넘치는 것처럼 부글거렸다.
결혼과 동시에 나는 갑자기 해야 할 도리 속에 파묻혀 허우적 거리다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진아가 되어 버렸다.
내가 해야할 며느리 노릇은 끝이 없었다.
심지어 결혼한 남자가 큰 아들이면 받은게 없어도 맏며느리 노릇을 해야 한다고 한다.
흠...이 정도면 그냥 같이 사는 것을 원하시는 건가?
하지만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
사위 노릇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어디서는 장서갈등이 유난이라는데 그런게 뭔데?
난 부모없는 천애고아같고
남편만 부모있어 떵떵거리고 유세부리는 형국이다.
나는 앞으로도 김장하는 날이 싫을 것이다.
그날만 되면
나의 사정은 늘 뒤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오면
나는 어른이 되는 걸까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